'소리없는 통화' 문자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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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소리 없는 통화'가 넘쳐나고 있다. 휴대전화나 유선전화로 하는 음성통화를 줄이고 문자메시지(SMS)로 대화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루 2억 건에 달하는 SMS가 한반도 상공을 날아다닌다. 국민 1인당 하루 네 건의 SMS를 날린다.

또 SMS가 더 이상 청소년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중.장년층도 SMS 대화를 많이 한다. 직장인들은 상하 의사소통 수단으로 공공기관은 대국민 알림 창구로 SMS를 활용한다. 사정이 이렇자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사용자 콘텐트(UCC)와 함께 'SMS 선거전'에 명운을 걸고 있다. 이번 주엔 밸런타인데이(14일)에 설(18일)까지 겹쳐 이동통신 업계가 비상이다. SMS가 폭주하면 통신망이 막힐 수도 있다. 지난해 11월 30일 잠시(오전 10~11시) 눈발이 날리자 SMS는 물론 음성통화 서비스까지 지연됐다. '겨울 첫눈'을 반기는 SMS가 한 시간 동안 2000만 건을 넘었기 때문이다.

◆때와 장소를 초월한 대화=남중수 KT 사장은 이달 초 경기도 분당 본사에서 서울 광화문 사무실로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를 열어 봤다.

임원의 긴급 보고였다. 그는 이어 '본사 근무 2004년 입사자 선착순 10명, 내일 점심식사 모십니다'란 SMS를 직원들에게 보냈다. 곧바로 휴대전화기에 '○○본부 ○○○입니다'라는 응답 메시지가 쏟아졌다. 남 사장은 "SMS로 주요 결재도 한다"고 말했다.

국가정보원 등 공공 기관은 물론 보험.의료계 등도 알림 내용을 SMS로 보낸다. 서울 행당동에 사는 김순용(67)씨는 인근의 한양대학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는데 병원이 SMS로 보낸 진료일자에 맞춰 병원에 간다. 그는 가끔 국가정보원이 보낸 '○○지역의 여행은 자제하세요'란 SMS도 받는다. 이처럼 SMS의 쓰임새는 날로 넓어지고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고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정보를 실시간으로 여러 사람에게 나눠 줄 수도 있다. 채용사이트인 '파인드잡'이 지난주 직장인(804명, 20~50대)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하루 평균 SMS 이용이 6.1건에 달했다. 음성통화(8.3건)에 버금가는 횟수다.

◆SMS의 그늘=SMS가 봇물을 이루면서 부작용도 적잖다. 우선 언어 파괴가 도를 넘었다. 'n이'(앤이←애인이)나 '밥5'(밥오←바보) 등과 같은 단축용어가 버젓이 생활단어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서울에 사는 중학교 1년생 이형재군과 경남 울산에 사는 대학생 박종규씨는 온라인 게임 사이트에서 만나 수시로 SMS를 주고받는데 이들의 문자메시지 내용은 세 음절을 잘 넘기지 않는다. '뭐 하니' '그냥' '예' '그래' 등이 고작이다. 대화 내용에는 'ㅂㅅ(병신)' 등과 같은 욕지거리도 숱하다. 심지어 일부 청소년들은 친구를 왕따시키는 수단으로도 활용한다. 원치 않는 쓰레기(스팸) 메시지도 양산한다. 남용 사례도 많다. 경기도의 중학교 2년생 김모군은 여자친구에게 하룻밤에 100여 건의 SMS를 보냈다. 그 내용은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여자친구를 재우기 위해서란다. 특히 올 연말의 대통령선거 때 악성루머가 담긴 SMS가 번질까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SMS는 신종 질환을 낳기도 한다. 액정화면을 수시로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정신불안 증세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엄지손가락 혈액순환 장애와 어깨 통증을 호소하는 엄지족도 있다.

이원호.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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