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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질서 무너지면 서민들이 먼저 피해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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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래서 공권력은 바로 서야 한다. 정부는 그동안 정치적 성향에 따라 국민 정서를 들먹이며 원칙 없는 공권력을 남용했다.

이젠 법과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법은 모든 이에게 고르게 적용되고, 이를 어겼을 때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인식이 정착돼야 한다.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은 지나친 사법 온정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엄정해야 한다. 이상인 (행정학) 경찰대 교수는 "공권력이 흔들리면 먼저 서민의 일상생활이 위협받을 수 있다"며 "사법기관은 과거 권위주의적 관행에서 벗어나 시민을 위한 서비스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법 온정주의'서 '법과 원칙'으로

1 불법적이고 상습적으로 공권력에 도전하는 행위에 대해선 온정주의적 시각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반(反)자유무역협정(FTA) 시위대는 국내에서 불법 집회를 강행하며 각목과 죽봉을 휘두른다. 하지만 외국에 나가면 철저히 준법시위를 한다. 현지 사법부가 폭력 시위자에게 전혀 관용을 베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5년 12월 홍콩 당국은 폭력시위를 한 한국 농민 시위대 11명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무관용 원칙(Zero Tolerance)'이었다. 반면 우리 법원은 지난해 12월 폭력시위 가담자 7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모두 기각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의 이헌 사무총장은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공권력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온정주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사법부가 원칙에 따른 법 집행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지난해 4월 일어난 포스코 본사 점거 농성에 대한 사법 처리는 무관용 원칙을 지킨 사례로 꼽힌다.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지난해 9월 농성을 주도한 포항건설노조 간부 27명에게 징역 1년6월~3년6월의 중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공무방해와 폭행.교통방해 등으로 이어져 죄질이 무겁다"며 "노사 협상이 타결됐다 해도 범법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물리력 행사 세부 기준 필요=민생 치안에서도 단속하는 경찰보다 단속받는 취객이 더 큰소리를 치는 게 요즘 공권력의 현주소다. 인권이 지상가치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경찰들이 필요 이상으로 위축되고 있다. 주취자가 상습적으로 소란을 피워도 경찰은 기껏해야 최고 10만원짜리 범칙금 스티커를 떼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경찰이 합리적으로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세대 심희기(법학) 교수는 "지금은 경찰이 인권 침해 논란을 걱정해 취객 등 난동자 관리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난동자를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법을 만들거나 경찰이 수갑이나 포승 등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에 명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동국대 곽대경(경찰행정학)교수는 "사건 현장에서 기준에 따라 행동한 것만 입증되면 어떤 결과에도 책임지지 않는 원칙을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내 진압'에서 적극 대처로=수세적인 시위 대처 방식인 '인내 진압'을 개선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그동안 경찰은 시위대와 거리를 두기 위해 전.의경 수송버스를 이용해 벽을 세우는 '차벽(車壁) 전술'을 구사해 왔다. 그러나 최근 시위대가 차벽에 불을 지르면서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경찰에선 살수차에서 최루액을 분사하거나 개인에게 최루액 분사기를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도입을 망설이고 있다.

'사진 채증→사후 처벌'의 현행 방식에서 벗어나 현장 검거에 중점을 둬야만 폭력시위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미국 경찰은 폭력 시위대의 엉덩이 아래 부위를 내리쳐 중상을 입히지 않고 제압하고 있다. 전주대 권창국(법학) 교수는 "앞으로 시위 진압의 핵심을 담당한 전.의경 제도가 폐지되기 때문에 경찰의 수적 우위에 바탕을 둔 시위 대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경찰도 업그레이드 하자

2 서울지방경찰청은 1일 '다기능 현장 증거 분석실'을 열었다. 미국 드라마로 잘 알려진 CSI(Crime Scene Investigation)의 한국판이다. 30평 남짓한 분석실엔 수억원대의 첨단 장비를 갖췄다. 한국판 CSI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 증거주의를 좇겠다는 경찰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경찰은 오랫동안 자백 위주의 수사 관행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강압수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 결과 많은 국민이 아직도 경찰을 비롯해 검찰.법원 등 공권력 기관에 대해 불신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가청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14개 청 가운데 검찰이 최하위, 경찰이 하위권을 기록했다.

경찰 등 수사기관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선 시대 흐름에 맞게 '권력기관'에서 '법 서비스기관'으로 변신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주문한다. 권위의식을 깨고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우문숙 대변인은 "국민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공권력 주체의 자의적 판단에서 벗어나 헌법에 명시돼 있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할 때 신뢰가 쌓이고 공권력이 바로 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 이후 국민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이 계속됐지만 아직까지 '인권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경찰 관련 인권침해 사건 중 가장 많은 것이 폭행과 인격권 침해다. 그동안 수사상 편의라는 명목으로 슬며시 넘어가곤 했다는 점을 경찰관들도 부인하지 못한다. 여성.장애인.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인사.교육체계 정비해야=한국 경찰의 인적 자원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고교 성적 상위권 학생들이 모이는 경찰대나 행정고시.사법시험 출신이 즐비하다. 순경도 요즘 공채 합격자의 80% 이상이 4년제 대학 출신이다. 문제는 우수한 자원들이 경찰에 입문하고 나면 '그저 그런 수준'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이다.

낙후된 인사 시스템이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승진 심사에서 엄정한 평가 기준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 등 외부의 인사 청탁이 위력을 발휘하고 실력보다는 '줄'을 찾는다. 일선 경찰서의 한 경위는 "시민들도 이런 약점을 잘 아는지 잘못을 저지르고도 '내가 고위직 누구와 잘 안다'며 큰소리를 친다"고 전했다.

최일선에서 시민들과 접촉하는 일선 지구대 경찰들의 교육을 강화해 현장 대처 능력과 자질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순경 공채에 합격하면 6개월간 중앙경찰학교에서 훈련받은 뒤 곧바로 현장에 투입된다. 이론교육만 받고 현장 경험이 별로 없어 제대로 치안활동을 펼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독일(36개월)이나 미국.일본(12개월)은 충분히 훈련된 경찰관을 일선에 배치한다.

손해배상소송으로 책임 묻자

3 형사처벌과 별도로 민사적 대응, 즉 돈으로 불법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방법이 효과적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적극적으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할 경우 불법행위자에겐 재정적으로 상당한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시위뿐 아니라 공무집행방해 등 각종 일탈행위에도 적용할 수 있다.

2005년 12월 미국 뉴욕의 지하철.버스 파업이 사흘 만에 종결된 것도 소송의 힘이었다.

파업 직후 법원은 노조원들에게 하루 100만 달러씩의 벌금을 부과하는 판결을 내렸고, 이어 뉴욕시도 파업 조합원 1인당 하루 2만5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압박했다. 뉴욕 일대 백화점과 상인협회도 10억 달러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하겠다고 나섰다. 350만 달러의 파업 기금을 갖고 있던 대중교통노조는 60시간 만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11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는 과격.폭력시위 이후 우리 경찰과 지자체는 적극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고 있다. 최근엔 광주시청과 충남경찰청이 "불법시위로 시청.차량 파손 등 피해를 봤다"며 반(反)FTA 시위대에 낸 부동산가압류 신청이 모두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재교 변호사는 "시위로 인한 피해는 주로 소액이어서 개인들이 일일이 소송을 제기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들이 쉽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법률 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무관용 원칙(Zero Tolerance)='깨진 유리창' 이론에 입각해 사소한 위법행위도 죄질이 나쁜 경우 엄격하게 처벌한다는 사법 원칙이다. 1994년 미국 뉴욕시가 이 원칙을 도입, 경범죄.윤락 등을 집중 단속함으로써 2년 만에 우범지대였던 '할렘 지역'의 범죄율을 40%나 떨어뜨렸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 11월 반FTA시위 이후 "불법.폭력시위를 법에 따라 엄단하겠다"며 이 원칙을 천명했다.

◆특별취재팀=이철재.한애란.천인성.권호(이상 사회부문) 기자, 뉴욕=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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