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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기획] 뜨는 포차, 지는 포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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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늦은 밤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운 포장마차와 젊은이들.

차가운 거리에 온기를 불어넣는 포장마차. 가장 서민적인 먹을거리를 제공한다는 포장마차의 아이템도 참 다양해졌다. 시시각각 바뀌는 포장마차의 세태와 그 성공 비결을 알아봤다.


호떡·군고구마·붕어빵·어묵·떡볶이…. 겨울철 길거리 음식의 대명사들이다. 그렇다면 케밥·오코노미야키·스파게티 등은? ‘설마 이런 음식마저…’ 한다면 당신은 이미 쉰세대다. 외국음식에 온갖 퓨전까지 ‘길거리표 음식’이 다양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이름도 생소한 메뉴를 내걸고 사람들의 입맛을 유혹하는 ‘마차’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세계화되고 트렌드에 민감한 도시 젊은 세대를 겨냥한 상술이 갈수록 현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 마차? 흔히 포장마차를 줄여 ‘포차’라고 부른다. 하지만 먹을거리를 파는 ‘로드숍(road shop·‘노점상’이라는 말의 어감이 부정적이라는 인식에서 업계에서 사용하는 은어)’ 업계 사람들은 이 용어를 단호히 거부한다. 늦은 밤 소주 한잔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포차’라면 자신들은 ‘마차’ 그 자체라는 것. 물론 먹을거리를 파는 마차는 겨울철이 성수기다. 하지만 요즘에는 겨울에만 마차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시사철 변하는 마차의 세계 이야기는 그래서 더 재미있다. 과속 또 과속! 아이템 너무 빨리 돈다. 먹을거리 아이템, 즉 메뉴는 다양하다. 가령 호떡을 예로 들어 보자. 한방호떡·녹차호떡·웰빙호떡 등 호떡이라고 다 같은 호떡이 아니다. 한 철 장사에서 신선한 아이템은 중요한 관건이다. 그렇다 보니 마차생활을 오래한 사람의 집은 온갖 장비들로 넘쳐난다. 유행을 따라가며 메뉴를 취급하다 보니 이 기계 저 기계 자꾸 사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명동에서 10년 동안 마차를 운영했다는 B(51)씨는 “솜사탕으로 시작해 5~6가지 아이템을 전전하다 지금은 수제 소시지를 하고 있다. 참 많이도 돌았다. 타이밍에 맞춰 기계를 팔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행이 다시 돌아올까 싶어 그냥 보관했지만, 쌓인 먼지를 털고 재사용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아이템이 신선하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구닥다리 아이템이지만 맛과 영업력으로 승부해 성공 가도를 달리는 로드숍도 많다. 김치전·떡볶이·순대볶음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름하여 마차의 스테디셀러 ‘김·떡·순’! 전통적(?) 아이템이지만 신세대 입맛에 맞게 변신하고 세 가지 메뉴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도록 잘 ‘포장’함으로써 롱런 가도를 달리고 있다. 서울 종로3가의 한 마차에서 친구와 함께 ‘김·떡·순’을 맛있게 먹던 대학원생 L(28·여)씨는 “다이어트 때문에 안 먹으려고 했는데…. 대학 다닐 때부터 너무 좋아해 지나다 냄새를 맡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며 밝게 웃었다. 일견 식상해 보이는 아이템이지만, 디자인만 잘하면 손님을 끌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여성창업대학원 양혜숙 원장은 “아이템을 진화시키라”고 조언한다. 그 성공 사례가 바로 호떡이다. 호떡이 처음 나왔을 때는 황설탕이 소의 전부였다. 하지만 일부 발 빠른 상인들이 황설탕에 땅콩을 잘게 부숴 넣은 소를 개발해 인기를 끌었다. 이른바 ‘황설탕+땅콩’ 소 돌풍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종 변형 아이템이 뒤를 이었다. 녹찻물을 넣어 반죽하는가 하면, 해바라기씨 등 참살이(웰빙) 재료를 더하는 등의 아이템이 나와 백가쟁명식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행 아이템을 잘 포착하되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재설정하는 일이다. 서울 강남 선릉역 주변에서 마차를 운영하는 한 상인의 성공 비결 역시 끊임없는 변신이었다. “커피를 팔았는데, 주변에 스타벅스 같은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장사를 그만둘 판이었어요. 그때 착안한 것이 가격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즉석 생과일 주스입니다. 처음에는 바나나로 시작해 지금은 키위·딸기·멜론 등으로 품목도 늘렸죠. 커피의 경우는 따뜻한 토스트를 함께 제공하자 직장인들이 간단한 요기 대용으로 많이 찾네요.”

성공 확률 단 1% “어떤 아이템이 뜬다고 해서 그것을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큰 오판이다.” 소액창업 전문 코디네이터인 상인교육센터 최성렬 센터장은 아무런 준비 없이 아이템 하나로만 승부하려는 창업 준비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자세다. 수능시험을 보러 가는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고 고사장에 들어가면 신이 돕지 않는 이상 백전백패다. 마찬가지로 철저한 사전 준비 없이 창업하면 망하기 십상이다. 어떻게 하면 준비를 잘할 수 있을까? 정답은 현장에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K(48)씨는 1998년 회사 사정으로 퇴직한 후 길거리 창업에 나섰다. 하지만 한 번도 장사를 해본 경험이 없는 그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동네에서 붕어빵을 팔아 봤지만 남는 돈이 없었다. 가장으로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K씨는 나이 40에 큰 결심을 한다. K씨는 서울 동대문시장의 한 노점에서 6개월간 무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상술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다시 신입사원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배우지 않았다면 저는 또 한 번 실패했을 것입니다.” 최성렬 센터장은 “100명이 창업하면 1명 성공하기 힘든 것이 이 업계”라고 말한다. 대부분 준비 없이 접근하기 때문에 마차 창업자들의 실패율이 높다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실패 확률이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인터넷에 장사 노하우에 대한 사전정보가 널려 있어 무모하게 덤비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음 등 주요 포털의 소액창업 카페들은 활발한 정보 교류의 장이 되고 있다. 신종 ‘차량마차’와 프랜차이즈 창업 앙증맞은 서체로 ‘たこやき(다코야키)’라고 써 붙인 빨간 미니버스를 본 적이 있는가? 이 차량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서울 시내 어디든 돌아다닌다. 차가 멈추는 장소가 바로 매장이 된다.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이 미니버스의 주인은 올해 31세의 L씨다. 직접 차량을 디자인했다는 L씨는 “시간대에 맞춰 정해진 장소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판매량이 적으면 언제든 다른 장소로 바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요즘 L씨처럼 이동차량을 이용한 창업이 늘고 있다. 차량 구입비나 도색 등 개조비·설비비 등을 생각하면 마차 여러 개를 살 수 있는 돈이 들지만 그만큼 장점이 많다. 창업경영연구소의 이상헌 소장은 “투자비용 대비 수익성을 논하자면 차량 이동형 창업만 한 것도 흔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성공 확률도 높다는 것이 이 소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손수레형 마차에 비해 상대적 약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매장 환경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치밀한 사전준비가 없으면 고객 확보에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창업 전에 장사하고자 하는 곳의 특성을 잘 파악한 후 시간대별 점포의 목을 어디로 정할 것인지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둘 필요가 있다. 요즘 로드숍 업계의 최대 변화는 신종 마차인 차량마차의 증가와 ‘마차 프랜차이즈’를 들 수 있다. 바야흐로 마차도 프랜차이즈가 대세인 시대로 접어들 조짐이다. 이동하면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테이크아웃 덮밥 프랜차이즈인 ‘밥스틱’처럼 신종 아이템을 개발해 공략하는 업체부터 ‘흥부네왕호떡’처럼 전통 아이템을 공급하는 업체까지 프랜차이즈의 ‘색깔’도 다양하다. 또 실제로 대부분의 신종 아이템을 개발하는 것도 이들 프랜차이즈 업체라고 한다. ‘밥스틱’ 상담실장인 김정애 씨는 “설비를 모두 갖춘데다 따로 가맹비가 없기 때문에 처음 하시는 분들도 쉽게 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며 “지속적으로 메뉴를 개발해 신선한 아이템 제공에 힘쓰고 있다”고 말한다. 언뜻 보기에 일반 마차는 마차와 설비만 갖추면 되는 만큼 프랜차이즈에 비해 더 싸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싼 게 비지떡이라 하지 않던가? 일반 마차는 단순 계산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든다. 우선 사전 준비에 드는 시간이나 이동 비용 등이 대표적이다. 프랜차이즈의 경우는 이를 본부에서 일괄적으로 대행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이동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게다가 프랜차이즈로 시작할 경우 업체에서 개업 이전에 판매교육도 따로 한다. 그런 만큼 실패 확률도 줄어든다. B꼬치구이 마차를 운영하는 K(42)씨는 “프랜차이즈인 만큼 훨씬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면서 “아이템을 고르기만 하면 프랜차이즈는 널려 있다”고 말했다.

▶신종 아이템 ‘밥차’와 밥스틱을 손에 든 소년.

‘살아 있는 골목’을 노려라. 사실 마차 영업은 모두 불법이다. 서울 명동·종로·신촌·동대문시장·강남역 등 상권이 발달한 지역의 기업형 포장마차에서부터 동네 길목의 생계형 포장마차까지 모든 마차는 구청의 단속 대상인 셈이다. 또 지방자치단체 입장에서는 미관을 해치는 마차들을 방치할 수만도 없는 입장이다. 하지만 “경제 사정이 어려운 시기에 생계형 마차까지 단속하는 것은 너무하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서울 마포구에서 로드숍을 하는 Y(50·여)씨는 “다 자식들 학교 보내려고 하는 거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한 달에 100만 원 벌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취업전선에서 실패하고 마차 세계로 뛰어든 K(29)씨도 비슷한 생각이다. “일자리가 없어서 하는 것인데, 국가가 범죄자 취급하면 되나?” 그렇다면 생계형 마차 초보가 단속을 피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장소는 어떤 곳일까? 일반적으로는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지하철역 근처가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곳은 상대적으로 단속이 잦은 지역이다. 상인교육센터 최성렬 센터장은 단속을 피하면서도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곳으로 일명 ‘살아 있는 골목’을 추천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출퇴근하는 길목”이다. “보통 2~3㎞ 정도 되는데, 잘 몰라서 그렇지 서울 시내 지하철역마다 꼭 하나씩은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예를 들어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이 그런 곳이다. 이런 곳은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 인근에 비해 자리 확보가 용이하고 무엇보다 단골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2007년, 마차 창업에 새로이 도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수많은 사람 중에는 웃을 사람보다 울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뜨고 지는 일 모두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는 점이다.

소액창업 전문가 이상용 씨가 말하는 군고구마통 탄생 비화

“고민 보름 만에 새 기계 완성…특허 내라는 권유 뿌리쳐”

1981년 11월, 이상용(46) 씨에게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도 추웠다. 가죽공장에서 일하던 이씨는 노조 위원장으로 추대돼 임금인상투쟁을 이끌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동료들을 이끌 만한 재목이 못된다고 생각하던 이씨는 결국 고민 끝에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소액으로 창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아이템을 구상하던 어느 날 군고구마가 번쩍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상용 씨는 연탄불 위에 자갈을 깔고 고구마를 굽던 종래의 군고구마 제조 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다. 한 번에 많은 고구마를 구울 수도 없고, 시간도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드럼통을 옆으로 누인 형태의 군고구마통이다. 머릿속에 맴돌던 구상을 스케치하며 1주일여를 고민한 끝에 설계를 완성했다. 하지만 정작 군고구마통을 제작할 드럼통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마침 친구 집에 빈 드럼통 2개가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한 이씨는 친구에게 군고구마를 원없이 먹여 주겠노라는 약속을 하고 가져와 통 제작에 돌입했다. 보름 만에 군고구마통을 만들어 낸 이씨는 떨리는 가슴으로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 군고구마를 구웠다. 그러나 구이통에서 꺼낸 고구마는 모두 새까만 숯등걸이 돼 있었다. 불 조절의 실패였다. 여러 번 실패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불의 세기를 익힌 이씨는 실망하고 집에 돌아간 동네 사람들을 다시 불러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군고구마통을 들고 처음 장사를 시작한 곳은 충북 청주시 문화동 옛 청주지방법원 네거리의 길모퉁이. 손님들의 반응은 쌀쌀했다. 검은 연기를 피우는 큰 드럼통에서 나온 군고구마를 선뜻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씨는 행인을 붙잡고 서비스 시식을 시작했다. 한 번 맛본 사람들은 그 맛에 감탄했다. 이렇게 입소문을 타고 그의 군고구마는 순풍에 돛 단 듯 팔려 나갔다. 그렇게 한 2년쯤 지나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로부터 군고구마통 제작에 대한 문의가 쏟아졌다. 심지어 돈을 주며 통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여럿 나타났다. 이씨의 지인들은 특허를 신청하라는 권유도 했다. 그러나 이씨는 그럴 만한 가치는 되지 않을 것 같아 제작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기 시작했고, 1985년께는 대전·서울 등을 시작으로 전국에 이상용식 군고구마통이 등장했다. “나같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군고구마통을 처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이상용 씨의 말이다. 지금의 군고구마통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를 넘어선 히트 아이템, ‘군고구마통표’ 군고구마는 이런 탄생 비화를 숨겨 둔 채 오늘도 추운 겨울 거리를 훈훈하게 데우며 인기몰이를 계속하고 있다.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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