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인기 끌 줄이야 …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겠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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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진=김성룡 기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시리즈 완결편인 제15권 '로마세계의 종언' 이 번역돼 나왔다. 1995년 9월 제1권과 제2권이 동시에 번역돼 출간된 지 11년 5개월만이다. 지난해 12월 15일 15권의 일본어판이 출간된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1권부터 14권까지 총538쇄, 250만부가 넘게 팔렸다. 여기엔 혼자서 15권 전 시리즈를 번역한 역자 김석희(55)씨의 공도 적지 않다. 간결하고 매끄러운 번역으로 읽는 맛을 더해준 그를 6일 만났다.

-책을 처음 접하는 순간, '이 책이다' 싶었나.

"솔직히 이렇게 많이 팔릴 줄은 몰랐다. 92년 '로마인 이야기'가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뒤 한국 출판가에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얘기가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여류''아마추어'작가라는 점에서 폄훼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95년 봄 한길사 김언호 사장이 일본에서 '로마인 이야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바다의 도시 이야기' 등 시오노 나나미의 저서를 사와 나와 정도영.오정환 선생에게 건네줬다. 가장 젊은 내가 '로마인 이야기'를 맡은 건 "한 해에 한 권씩 15년 동안 쓰겠다"는 저자의 말 때문이었다."

-이 시대 우리 현실에서 이 책이 각광받는 이유는.

"1권이 나왔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세계화'가 화두였다. '로마인 …'에서 드러난 로마제국의 세계경영.현지화.포용력 등이 세계화의 모델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의 현실은 1권 초판이 출간된 92년 일본과 비슷하다. 당시 일본 경제는 거품이 꺼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거물급 지도자도 없었다. 천재적인 창조적 지도자,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로마인 …'를 읽게 했다. 지금 우리 현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번역은 어떻게 했나.

"일본 출판사(신초샤)에서 원고를 미리 주지 않는다. 15권을 일본에서 나온 다음날 받았다. 이틀 전부터 '로마인 …' 앞 권들을 읽으며 문체에 익숙해지도록 준비를 했다. 하루에 10시간씩 번역해 20일 정도 걸렸다. 원고지 1800매 분량이었다. 내 번역 원칙은 '원문이 뭔지 드러나지 않게 번역하는 것'이다. 작가에 따라 문체의 고유한 맛을 보존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시오노의 문장은 그렇게 고급 문장은 아니다. 때론 거칠기도 하다. 그래서 읽는 맛도 나고 번역가로서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도 많다."

-지난해엔 '마시멜로 이야기'의 '대리번역'파문이 불거지기도 했는데, 우리나라 번역풍토에 대한 생각은.

"사회 어느 분야에나 사기꾼은 있다. 번역계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렇게 일이 한번 터진 게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이젠 독자가 안다. 책 한 번 안 써본 사람이 번역했다고 하면 '이름만 빌려줬구나'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번역 문화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번역물은 교수 연구 업적에도 포함이 안 된다고 한다. 외국어로 번역하는 수준은 더 낮다. 이래서는 노벨상은 꿈도 꿀 수 없다."

-신춘문예 등단 소설가이기도 한데, 번역을 하다 보면 창작에 대한 열의가 되살아나지는 않나.

"젊었을 때는 '번역은 조강지처 같고 창작은 애인 같다'고 하면서 창작과 번역을 병행했는데, 쉽지 않았다. 소설을 쓰다 보면 번역 마감을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96년부터는 번역만 하고 있다. 시시한 소설을 쓰는 것 보다 좋은 번역을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창작에 대한 어렸을 때부터의 꿈을 접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에피소드나 장면이 있으면 메모하고 있다."

글=이지영 기자<jyle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김석희씨=영어.불어.일어를 넘나드는 번역가. 1976년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했고, 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이상의 날개'로 등단했다. 번역서는 '털없는 원숭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일주' 등 200여권에 이르며, 97년에는 역자 후기를 모아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을 펴냈다. 제1회 한국번역대상 수상자(97년)로, 현재 국내에서 가장 고료를 많이 받는 번역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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