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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명아나운서 이광재씨|LA서 방송선교사로“제2의 인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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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조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태국의 수도 방콕입니다…화랑정신을 이어 받은 우리 대한의 아들들, 선전분투해서 기어코 조국에 승리를 바칠 것입니다.』
『한국팀 뽈(공) 잡았습니다. 페널티에어리어 전방을 육박하고있습니다. 슛찬스 나느냐, 나느냐 슈∼웃 꼬∼린(골인). 꼬린입니다. 동포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격정적인 목소리로 한시대를 주름잡았던 명스포츠중계 아나운서 이광재씨(58)는 지금 미국로스앤젤레스 인근 세리토스에 있는 은혜한인교회에서 방송선교사를 하며 복음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지난 50년대말부터 60년대에 걸쳐 각종 스포츠중계를 2천여회 이상하면서 청취자들의 귀에 추억처럼 남아있는 이씨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도 쟁쟁하게 살아 있었다.
이씨의 마이크인생은 대학2년때인 지난56년 KBS에서 실시한 아나운서공개모집에 응시하면서 시작된다.
이씨는 당시 4년제대학 졸업자에 한정된 응시자격을 무시하고「건방지게」도전, 지방경력아나운서들을 포함해 3백여명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수석합격을 차지했다.
나중에 대학2년생의「무자격응시자」임이 발각돼 합격취소통보를 받았으나 몇개월후『당신의 소질이 너무 아까워 특채를 한다』는 방송국 측의 연락을 받고 학생신분의 아나운서가 됐다.
56년 그가 스포츠중계 전문아나운서로 변신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다.
당시 임택근 아나운서를 보조하며 권투중계를 하기로 되어있던 일정에 차질이 생겨 이씨는 얼떨결에 첫스포츠 중계를 맡게 됐다.
1시간30분 동안 마음껏 내쏟은 그의 살아있는 혼은 방송국 고위층의 마음에 쏙 들었고『자네는 앞으로 스포츠중계를 전문으로 하라』는 말을 듣게됐다.
이후 이씨는 60년 로마, 64년 동경, 68년 멕시코 올림픽을 목소리 하나로 뛰었고 축구·농구·야구·권투등 모두 16개 종목을 중계하는 KBS의 간판급 아나운서로 자리를 굳혀나갔다.
70년은 그에게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를 던져준 해였다.
당시 KBS아나운서 실장이었던 이씨는 민간방송으로 자리를 뜨는 동료들을 지켜보던중 「딴데로 이적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외압을 받고「미국의 소리방송」(Voice of America)에 파견근무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는 소련·중국등지에서「쏘아」대는 북한의 대남방송이 위협적일 때였지요. 미국무부에서 그에 필적할만한 대북방송 아나운서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해봤었지요.』
70년4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미국수도 워싱턴시로 파견근무를 떠나면서 이씨의 미국인생은 시작됐다.
2년여 기간동안 VOA에서 전파를「날리던」이씨는 유엔에 북한대표부도 들어서는데 교포선도를 위해 미국에 남아있는게 어떻겠느냐는 뉴욕 총영사의 권고를 받고 고민끝에「재미교포」가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후에도 그는 마이크를 놓지 않고 뉴욕한인방송, 필라델피아한인방송, 워싱턴시 한인방송을 설립해 미동부지역에 최초로 한국어방송을 내보내는 정열을 과시했다.
『교포들의 성원이 대단했지요. 척박한 이민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에게 라디오를 통해 생생한 우리말이 전해지자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습니다.』이씨가 한창 교포방송에 힘을 쏟고 있을 무렵인 70년대 후반 박동선사건이 터지면서 한국정부 관계자 1백여명이 미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아야했다. 이때 이씨도 함께 조사대상에 올라 국회청문회에도 서는등 정신적인 고초를 당했다고 했다.『이 당시 교민의 고초를 위로해주고 힘을 복돋워준 분이 있었지요. 워싱턴 중앙장로교회 이원상 목사였습니다. 그때 그분이「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는 하느님말씀을 전해주시면서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이 됐다. 84년 세리토스의 은혜 한인교회로부터 복음방송을 할 의향이 없느냐는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 이때부터 그는 로스앤젤레스 기독교방송국장 직함을 얻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본격적인 방송선교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진정 나의 길을 정착시킨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목소리, 하루종일 떠들어도 목이 쉬지않는 것은 분명 하느님이 주신 재능이 분명하지요. 하느님이 주신 재능으로 전도사업에 최선을 다할것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지난날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한번은 인천∼서울구간에서 빌어진 국제마라톤대회를 생중계하던중 한국선수가 골인 3백여m 남겨놓은 지점에서『이제 30m 남겨놓았습니다』라고 했다는 것.
이상스런 고집이 생겨 이를 정정하지 않고 한참후에『20m남았습니다』, 또 한참 후에 『10m 남았습니다』하는 식으로 방송을 내보내 그날 상부로부터 야단을 엄청나게 맞았다.
다음날 신문고십난에「참 오래걸린 30m…」하는 기사가 실려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고 이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웃었다.
또 김일 선수가 등장한 레슬링경기를 듣다가 한 할머니가 쇼크를 받아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KBS측은 이 원인이 이아나운서의『김일 선수, 박치기, 박치기, 박치기…』하는 특유의 격정적인 목소리에 있었다고 판단, 이씨에게 3개월간 레슬링중계 금지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이제 이씨는 한국의 수백만 시청자들을 위해 목청을 불사르던「아나운서 이광재」에서「인간 이광재」로 조용한 변신을 했다.
KBS아나운서생활 20년을 포함해 지금까지 35년 동안 한번도 마이크를 떼놓고 살아보지 못한 타고난 방송인이지만 그에게는 이제 하느님사업이 인생 최대의 과제로 다가와 있다. 이를 위해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로스앤젤레스 트리니티신학교와 캘리포니아 유니언신학교를 마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씨는 은혜한인교회 담임목사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교회운영의 실제적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또 이씨는 20여개국에 이르는 해외선교전략을 짜는데도 최고의 브레인으로 참여하는 등이 교회 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중국·소련등지에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이씨는 간간이 교포들의 행사에도 나타나 주위의 주문에 따라 옛시절 스포츠중계를 재연하기도해 각박한 한인이민사회에 촉촉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술·담배는 물론 미국땅에서 그 흔한 골프마저 삼가고 있는 그는 기회가 닿으면 목사안수를 받겠다고 했다.
【로스앤젤레스=이원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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