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전 배구선수 강만수 씨|망중한 즐기고 있는 「불멸의 거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선수로서는 「환갑의 나이」가 훨씬 넘었으면서도 최근까지 아시아의 거포로 명성을 떨치며 숱한 한·일 여성 팬의 심금을 울렸던 강만수씨(37).
1m 95㎝·95㎏의 우람한 체격에다 딱 벌어진 어깨…. 그리고 신천옹처럼 코트를 날아 시속 1백 40㎞의 강 스파이크를 벼락치듯 때리는 모습에 여성 팬은 물론 남성 팬들도 매료되고만 것이다.
80년대 초까지 아시아 코트를 주름잡았던 그는 이른바 「강 쇼크」라고 표현되는 「강만수 증후군」이 널리 퍼져 우리 나라보다 오히려 배구 저변이 넓은 일본에서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대부분의 일본 여성 팬들은 강만수의 플레이에 사로 잡혀 팬클럽을 조직했으며 한때 동경에만도 10여개의 팬클럽이 결성돼 그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몇몇 일본 여행사들은 약삭빠른 상혼을 발휘, 「강만수 해외여행」을 주선할 정도였다. 이처럼 일본 여성팬들이 「강만수 열병」을 앓은 것은 잔재주 위주의 일본선수들과 달리 그의 대포알 같은 폭발적 강 스파이크 등 현란한 플레이 때문이다.
지난 83년 현대자동차서비스의 유니폼을 벗고 국내 현역 생활을 마감할 때까지 그를 따라다닌 에피소드도 많다.
배구장이나 농구장은 지금이나 예나 마찬가지지만 여고생들이 주축을 이룬 10대 소녀 팬들이 스타의 플레이에 괴성을 지르며 울고 웃게 마련이다.
한국배구의 간판으로 군림하던 시절 강도 극성 소녀팬들에게 시달려 경기가 끝난 후 땀에 젖은 윗옷은 물론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수건까지 뺏기는 해프닝도 감수해야 했다.
그러던 그가 현역을 물러나면서 한재일 동포의 주선으로 84년 10월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7년, 학비를 벌기 위해 현역 생활을 병행하는 고달픈 나날 속에서 와세다대학에 이어 도카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지난 4월 금의환향한 것이다.
『지난 겨울시즌 니혼(일본)리그까지 뛰었으니 현역 생활만 20여 년 한 셈입니다. 정신없이 보낸 세월이었어요. 이제 오랜만에 많은 시간을 갖고 지난 일을 되돌아보며 장래설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선수 생활하랴, 공부하랴 너무 바쁘게만 세월을 보낸 탓인지 과거보다 다소 여위어 보이는 그는 특유의 넉살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일본 유학기간이 아름다운 추억거리로 남아있다』고 회고한다.
동경의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그를 보고 심지어 숙소까지 찾아온 일본 여성팬들의 사인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고, 자신을 알아본 동사무소 직원마저 서류를 먼저 처리해주는 「특대」를 받기도 했다.
또 전성기 때 아시아에서 쌍벽을 이루던 중국 출신 동갑내기 거포 왕자웨이(왕가위)를 도레이팀에 끌어들여 풋풋한 정을 나누던 한솥밥 생활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라고 한다.
『요즘에는 경기장을 부지런히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7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주위 사람들도 만나고 태릉과 경기장에서 만난 후배들에게 일본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 짬을 내서 가족과 함께 차를 몰고 이곳저곳 정처 없이 다니며 고국의 변한 모습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거포」 「세계 배구의 신성」 「동방의 초인」 「불멸의 거포」… 그의 이름 앞에 수 없이 따라다닌 수식어가 말해주듯 그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는 아시아의 슈퍼스타였다.
그는 경남 하동중 시절 배구 볼을 잡아 부산 성지 공고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국가대표 생활 12년으로 배구에선 최장수 태극 마크를 달고 한국을 세계 속의 강호로 끌어올린 주역이었음은 주지의 사실.
강이 현역에서 활약할 때의 한국 배구는 그야말로 장미 빛 시대를 구가했다.
지난 78년 방콕아시안 게임에서 조국에 대회 첫 금메달을 안겼고 그해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이인(39·현 대표 감독)과 콤비를 이뤄 한국을 4강까지 도약시키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때의 성과는 최근 남미와 서구 배구의 급신장 추세로 미루어 한국 배구 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 틀림없다.
『요즘 한국 배구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비록 부상 중이기는 하나 이상렬과 하 종화 같은 우수한 선수들의 기량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어 기대를 해 볼만합니다.』
한국배구를 비교적 낙관적으로 진단한 그는 후학들을 가르치는 학교강단에 서는 것이 소망이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일선에서 지도자 생활도 하고 싶다고 밝힌다.
『최근 들어 우리 선수들은 끈기와 집념을 잃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선수 층이 엷은 것이 앞으로의 커다란 문제입니다. 일본에는 중·고·대학·실업팀이 3천 개나 됩니다. 저변이 넓은데다 하고자하는 의욕이 강합니다. 대학의 경우 1학년생은 심부름꾼이고 2학년은 플로어에 뒹구는 일만 되풀이해야 합니다. 3학년이 돼야 비로소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데 군대처럼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불평하는 선수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도레이 팀에 입단, 선수 생활을 하며 구단 측의 주선으로 도카이 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중 2부 리그의 도레이 팀을 우승시켜 단숨에 1부 리그로 끌어올리며 「역시 강만수」란 찬탄을 들었다.
『우리 돈으로 매월 4백만원 정도 받았어요. 아파트는 구단 측에서 제공하고…….
월급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어느 정도 저축도 했습니다. 공부도 하고 돈도 번 셈이지요.』
귀국한지 3개월이 지난 지금도 도레이 팀으로부터 코치 겸 선수로 와달라는 전화를 여러 차례 받았다는 그는 『그러나 그 동안 맺은 정리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나를 키워준 한국 배구 발전에 공헌하여 고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말한다.
귀국한 후 서울 둔촌동 주공아파트를 전세 얻어 살고 있는 그는 83년 결혼한 부인 김정희 씨(33)와 7세·3세 된 두 아들과 함께 모처럼 「실업자 생활(?)」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방원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