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본 방송 '베끼기' 부끄럽지 않은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최근 일본 후지TV가 특정 프로에 대해 베끼기 의혹을 제기하며 KBS와 SBS에 서면 질의서를 보냈다. 두 방송사는 표절이 아니라는 공개 답변서를 곧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종합 오락프로그램의 경우 서로 비슷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는 게 반론의 골자다.

우리는 특정 프로에 대한 베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양국 방송 관행상 처음으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1970~80년대 방송계에서는 일본 프로를 베끼기 위해 '부산으로 출장간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회자되곤 했었다. 이런 풍토 아래서 자라온 방송계 종사자들에게 일본 방송 프로 모방에 대한 무신경이 알게 모르게 퍼져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현재도 네티즌이 일본 등 외국 프로그램을 본뜬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의 프로그램이 10여개가 넘는다. 방송사들은 '방송 프로 표절'에 대한 기준이 모호함을 들어 이를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너무나 충격이었다… 2년 전 일본에 있을 때 봤던 프로와 똑같았다'는 네티즌들의 글을 '허튼 소리'로만 치부할 수 없다. 한 방송사의 프로가 인기를 모으면 그것을 약간 각도를 비틀어 비슷한 유의 프로를 잇따라 냄으로써 '그 방송이 그 방송'이라는 시청자의 비판을 받는 것이 오늘의 방송사들이 아닌가.

이미 우리는 위성방송 시대에 들어서 있고, 디지털 방송 개막을 앞두고 있을 정도로 방송의 하드웨어적 발전은 눈부시다. 그런데 정작 방송의 핵심인 소프트웨어는 낙후된 지상파방송 시대에 머물러 있다. 방송 포맷도 수출할 수 있는 세상에서 베끼기 오명이나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방송사들은 그간의 제작 태도를 지양하고 첨단 방송시대에 걸맞은 프로그램 제작으로 나아가야 한다. 프로듀서들의 창의성을 계발하고, 실험정신을 높이 사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시청률에만 매달려 걸핏하면 프로를 내리지 말고 긴 호흡으로 프로의 정착을 지켜보는 방송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