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사의여행스케치] 쿠바 아바나의 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4면

낡은 쿠바 국적 비행기가 멕시코 칸쿤을 출발했다. 하늘을 나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덜컹거렸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아바나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입국심사원들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한 사람당 적어도 2분씩은 투자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작은 비행기 한 대의 승객들을 여섯 개 창구에서 소화하는 데 딱 한 시간 걸렸다. 체 게바라의 혁명은 공항 직원들의 올리브색 유니폼에나 그 자취를 남겨놓고 있었다.

쿠바에서의 일정은 열흘이 채 되지 않았다.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간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가 읽지 않고 잘 싸두었던 체 게바라 평전을 카리브 해변에 앉아 읽고 싶었고, 아바나의 밤거리를 거닐며 쿠바산 시가를 한 대 피워보고 싶었으며, 쿠바 음악을 연주해 주는 바에 앉아 모히토(럼주와 라임, 민트잎으로 만든 쿠바 칵테일) 몇 잔을 마셔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별다른 일정 없이 아바나 시내의 한 노천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그를 만났다. 레스토랑 엘 파티오에서 근무하는 에드와르도는 나와 같은 나이의 유쾌한 쿠바 흑인 친구였다. 내 MP3 플레이어에 관심을 갖고 성당 앞 광장에 앉아 있던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와 전자사전, 휴대전화를 온 몸에 지니고 있는 녀석은 영어도 잘하고 인터넷과도 친했고 관광청 공인 레스토랑 웨이터증도 달고 있었다. 2일 1교대로 하루 열여섯 시간을 고되게 일한다지만 자기네 레스토랑에 오는 수많은 여자를 꼬드겨 살사를 추러 가는 '선수'의 모습에선 피곤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비번이던 날 함께 밤거리로 나섰다. 현지인과 있다 보니 혼자서는 갈 수 없었을 동네마저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새벽까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같이 춤 출 여자를 찾았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밤은 매일 있잖아."

그는 폐쇄적인 쿠바 사회가 싫고 어디든 외국에 가 보고 싶다고 반복해 말했다. 남쪽의 꼬레아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진짜 꼬레아라고 주장하는 그에게서 환상의 무게에 짓눌린 절망을 보았다. 그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한국인의 해외 자유여행 역시 10여 년의 역사를 가졌을 뿐이며, 머지않아 쿠바인들도 한국 사람들처럼 해외를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으리란 추측 정도였다.

오영욱 일러스트레이터·건축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