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이런, 예의 밝은 백남준 선생이 이런 장난을 치다니…. 어이가 없구만."
1986년 당시 삼성전자 홍보담당 이사였던 손석주(68)씨는 백남준이 보내 온 선물을 보곤 아연실색했다. 작고한 홍진기 회장의 장녀인 홍라희 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에게 전해달라는 선물은 다름 아닌 크레파스 그림. '유치원생이 장난질을 해놓은 그림'을 상사에게 전해드릴 수 없었던 그는 창고 한구석에 그림을 방치하고는 모두 없던 일로 한다.
20여 년 전 벌어진 이 웃지못할 해프닝을 손씨는 이제서야 털어놓았다. 백남준 타계 1주기를 기념해 출간한 추모문집 'TV 부처 백남준(白南準)'(삶과 꿈)에서다. '20년만의 양심고백'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고인에게 용서를 빌고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저의 허물을 용서해주십시오. 겉으로는 선생님의 작품을 최고라고 PR하고 다녔지만 속으로는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정성을 다해 그려준 파격적이고 첨단적인 그림을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했나이다…."
추모문집에는 이들 외에도 유홍준 문화재청장, 무용가 홍신자, 건축가 김원,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가수 조영남 등 50여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백남준과의 인연과 추억을 끄집어낸다.
아이디어는 수필가 이경희씨, 국악인 황병기씨 등 아홉 명이 지난해 3월 만든 '백남준을 기리는 모임'에서 나왔다. 백남준의 생일인 7월 20일 개최한 좌담회에서 추모 문집을 내기로 뜻을 모았다. 기획을 맡은 미술평론가 이규일씨는 "50여 명 모두 각기 다른 시각으로 글을 써서 백남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며 "백남준의 삶과 작업들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문집에는 백남준과의 개인적인 추억 외에도 그의 작품에 관한 미술사적 의미, 재조명을 위한 제언 등이 함께 들어있다. '백남준을 기리는 모임'의 공동대표 이경희씨는 "책을 만들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아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는 백남준의 기일인 29일 오후 6시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다.
박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