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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타계 1주기 … 50인 추모문집 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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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런이런, 예의 밝은 백남준 선생이 이런 장난을 치다니…. 어이가 없구만."

1986년 당시 삼성전자 홍보담당 이사였던 손석주(68)씨는 백남준이 보내 온 선물을 보곤 아연실색했다. 작고한 홍진기 회장의 장녀인 홍라희 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에게 전해달라는 선물은 다름 아닌 크레파스 그림. '유치원생이 장난질을 해놓은 그림'을 상사에게 전해드릴 수 없었던 그는 창고 한구석에 그림을 방치하고는 모두 없던 일로 한다.

20여 년 전 벌어진 이 웃지못할 해프닝을 손씨는 이제서야 털어놓았다. 백남준 타계 1주기를 기념해 출간한 추모문집 'TV 부처 백남준(白南準)'(삶과 꿈)에서다. '20년만의 양심고백'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고인에게 용서를 빌고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저의 허물을 용서해주십시오. 겉으로는 선생님의 작품을 최고라고 PR하고 다녔지만 속으로는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정성을 다해 그려준 파격적이고 첨단적인 그림을 쓰레기통에 폐기 처분했나이다…."

추모문집에는 이 외에도 백남준의 천재성과 순수함을 엿볼 수 있는 재밌는 일화들이 전해진다. 재미 화가 강익중씨는 '"30세기에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라는 질문에 모인 사람들이 번쩍 깨어났다. 그러고는 아이와 같이 씩 웃으시는 맑은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적고 있다. 1990년 갤러리현대 뒷마당에서 백남준이 요제프 보이스의 진혼굿을 할 때 큰 느티나무가 천둥벼락을 맞았던 기억(박명자.전 현대갤러리 대표), 1993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이우환의 개인전에 참석했을 때 자신에게 시선이 더 쏠리자 아예 전시장 밖 모퉁이로 도망쳐간 사연(이용우.미술평론가) 등 회고가 이어진다.

추모문집에는 이들 외에도 유홍준 문화재청장, 무용가 홍신자, 건축가 김원,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가수 조영남 등 50여명의 문화계 인사들이 백남준과의 인연과 추억을 끄집어낸다.

아이디어는 수필가 이경희씨, 국악인 황병기씨 등 아홉 명이 지난해 3월 만든 '백남준을 기리는 모임'에서 나왔다. 백남준의 생일인 7월 20일 개최한 좌담회에서 추모 문집을 내기로 뜻을 모았다. 기획을 맡은 미술평론가 이규일씨는 "50여 명 모두 각기 다른 시각으로 글을 써서 백남준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며 "백남준의 삶과 작업들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모문집에는 백남준과의 개인적인 추억 외에도 그의 작품에 관한 미술사적 의미, 재조명을 위한 제언 등이 함께 들어있다. '백남준을 기리는 모임'의 공동대표 이경희씨는 "책을 만들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아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출판기념회는 백남준의 기일인 29일 오후 6시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열린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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