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대통령(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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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닉슨은 옐친을 팔푼이(boob)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닉슨이 지난 4월 모스크바를 방문해 옐친을 직접 만나보고 그만 홀딱 반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최면술」에 걸릴 정도였다. 「애니멀 매그니티즘」이라면 동물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뜻인데 좀 외설적인 뉘앙스가 풍기는 그 단어를 닉슨은 미국에 돌아와 기자들에게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고르바초프는 월 스트리트,옐친은 메인 스트리트』라는 말도 재미있다. 닉슨의 재담이다. 고르바초프가 자본주의 취향이라면 옐친은 변두리 달동네를 거니는 사람 같다는 얘기다.
닉슨은 그 말끝에 『고르바초프는 조지타운의 응접실,옐친은 뉴어크의 공장대문』이라는 말도 했다. 조지타운이라면 수도 워싱턴시의 부자촌,뉴어크는 서울로 치면 구로공단쯤 된다. 두 사람의 대조적인 됨됨이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옐친에 대한 평판중엔 부정적인 것도 있다. 보수적인 소련 사람들은 「고주망태의 시골뜨기」,「공산당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돋우는 고집불통의 사나이」라는 말도 한다.
그는 한때 고르바초프에 의해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장 자리에서 밀려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년반만에 러시아공화국 인민대표자회의 대의원에 출마,모스크바 유권자 5백50만명중 5백만표라는 어마어마한 지지속에 눈부신 재기를 했다. 지난 89년의 일이다. 인민대표회의 의장이 된 것도 그 후광이었다.
우랄공대 건축학과를 나와 정치에 입문한 그는 소련처럼 음험한 정치풍토에서 그야말로 장외정치」로 입신한 대중정치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후 이런 정치인은 일찍이 없었다.
그런탓인지 정치적인 허풍기도 있는 것 같다. 가령 오는 2000년까지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아파트를 한채씩 나누어 주고,향후 2년안에 눈이 번쩍할 정도로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바꾸어 놓겠다는 따위의 공약은 아무리 에누리를 해도 믿기지 않는다.
바로 그 옐친이 이제는 소련 역사상 최초의 러시아공화국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 닉슨도 진작 옐친의 그릇을 알아보고 미국의 외교는 고르바초프의 얼굴만 보지말고 옐친에게도 주목해야 한다는 충고를 했었다. 우리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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