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적 소재에 언론도 맞장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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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요즘 서점에 들러보면『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여자란 무엇인가』『절차탁마 대기만성』『도울세설』『대화』등 10여권이 한곳에 놓여 있는 것을 흔히 보게된다. 이 책들을 한 사람이 10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다 썼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 관심을 끄는 사실은 이 책들이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적이 있거나 지금도 올라 있는 책들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없는 하나의 신화가 있다.
이야기는 82년9월 고려대학교 한 강의실에서 시작된다. 처음 보는 젊은 교수가 아무 말 없이 강단에 올라 칠판에 노자의 첫 구절「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을 써놓고 영어로 번역한 다음 중국어로 읽고 일본어로 주석을 달았다. 이것이 김용옥 신화의 도입부다.
그후 다방면의 저술활동, 양심선언, 교수직 사퇴, 삭발, 연극·영화·무용·태권도·한의학 등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화제를 뿌리며 신화를 더욱 부풀렸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한 재벌과 자리를 함께 하는 장면을 연출하여 신화의 극적 효과를 한껏 높였다.
여기에는 감각적인 언론과 김용옥씨 특유의 천부적인 상업주의 학문개념도 일조 했다. 그의 저서 대부분이 센세이션을 일으킬 만한 대중적 소재를 다룬 것이었고 언론이 따라가며 이를 부추긴 것이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 감이 있지만 김용옥 신화를 80년대의 문화현상이라는 차원에서 일단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의 공은 한마디로 하자면「철학의 대중화」에 있다. 우리나라 철학계에서 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김용옥씨를 꼽아야 한다. 운동권을 중심으로 많이 읽힌『세계철학사』와 『철학에세이』는 물론이고 윌 두란트의『철학이야기』도 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이것들은 모두 외국책을 번역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철학의 대중화」의 관점에서 김용옥씨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철학의 대중화」란 면에서 그의 일차적인 기여는 대중과 괴리되어 강단에 갇혀 있던 철학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철학에 대한관심을 일깨웠다는 것이다. 그의 개인적인 독단·언어 폭력·좌충우돌 식의 글쓰기 등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반드시 수용해야 할 가치 있는 제언은 많다.
고전의 중요성, 동양문화에 대한 자부심, 번역 경시 풍조에 대한 이론적 비판, 주체성 자각 등이 그렇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본인 스스로 구체적 작업을 통해 모범이 되어주질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시간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문제는 그가 지금까지 제반활동을 통해「대중의 철학화」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데 있다. 얼핏 비슷한 개념 같지만「철학의 대중화」와「대중의 철학화」는 다르다. 기존의 철학들을 적당히 통속화하여 서술하는 것이 철학의 대중화라면 대중의 철학화는 대중들이 스스로 올바른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 그들의 사고수준을 높이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김용옥씨의 글은 사실『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외한다면 대중의 철학화에 기여했다기보다는 대중들을 현 수준에서 묶어둔 채 기존의 철학과 자기독단을 잘 포장해서 판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독자들은 오랫동안 김용옥씨가 생산한 글의 충실한 소비자역할을 해봤다. 이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물론 일차적인 이유는 학문적 내용보다는 뭔가 신기하고 특이한 것을 찾아 헤매는 대중사회 속의 인간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본질적인 것보다는 즐거움이나 호기심에 쉽게 사로잡히는 것이 대중사회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제대로 읽을만한 철학 책이 없었다는데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철학계의 고질적인 문제다. 철학사 연구와 철학적 탐구조차 제대로 구별되지 않는 풍토에서 대중들이 쉽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도록 내용 있는 책을 써낸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주문일지 모른다. 잡스러운 에세이는 흘러 넘쳐도「현대」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없기 때문에 이 땅의 철학계는 빈곤한 것이다.
크게 이런 두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김용옥 신화는 가능했다고 보여진다. 신화는 단순한 허구와는 구별된다. 오히려 신화는 당시의 사회상을 철저하게 반영한다. 그리스 신화나 단군신화를 통해 당시의 사회적 관계들을 알아낼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신화의 사회 반영적 성격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김용옥 신화는 결코 바람직스럽다고 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서상황, 철학계의 현실, 그리고 크게는 독재의 경험 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 자체의 발전은 물론이고 대중의 수준을 끌어올리는「대중의 철학화」를 위해서라도 철학계 전체는 철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공개적인 학문토론의 활성화, 인맥-학연을 떠난 공정한 교수 선발, 철학교육프로그램의 다양한 개발을 통해 모두의 지혜를 모을 때「유령처럼 떠돌고 있는」신화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한국인의 주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건강한 사고는 싹틀 것이다.【이한우(자유기고가·외국어대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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