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정부 자료 받아 쓰는 나팔수 기자 원합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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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각 부처(기자실)에 몇몇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기사 흐름을 주도해 나가는지, 혹은 그런 기자들이 보도자료를 가공해 담합하는지 조사해 보고해 달라."

노무현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그렇게 말했다. 사례로 든 것은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대책' 기사였다(본지 1월 16일자 12면). 복지부가 좋은 정책을 내놓았는데 기자들이 '담합'해 선심성 정책으로 폄하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언론을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비판이 제기될 때면 어김없이 모든 걸 언론 탓으로 돌려왔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또 그러는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복지부를 출입하는 우리 기자들은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만큼은 정말 어이가 없다.

노 대통령의 주장은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다.

우선 대통령이 말하는 기자실은 정부 부처 어디에도 없다. 참여정부는 출범 직후 부처마다 있던 기자실을 없애고 통합 브리핑룸으로 바꿨다. 국정홍보처가 외국까지 나가 사례 수집을 하고 가장 좋은 시스템이라고 만든 것이다. 이 브리핑룸을 복지부.노동부.환경부.과학기술부가 함께 쓴다. 이런 상황에서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사의 방향을 담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복지부에는 55명의 출입기자가 등록돼 있지만 평소 브리핑룸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4~5명밖에 안 된다. 대부분 현장 취재를 다닌다.

언론의 경쟁은 치열하다.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경쟁사보다 질 높고 차별성 있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한다. 누구도 경쟁사 기자와 기사 방향을 상의하지 않는다. 만에 하나 그런 사실이 있다면 회사에서 징계를 받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기자들이 보도자료를 있는 그대로 안 쓰고 '가공'해서 만들어간다고 표현했다. 나는 정말 궁금하다. 정부가 발표한 자료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옮겨쓰기만 하는 '정권 나팔수'기자를 원하는 것인가. 기자들 사이에선 "그럴 바엔 차라리 모든 언론매체를 없애고 국정홍보처 직원들이 정부 입맛대로 여론을 조성하라"는 말까지 나온다.

노 대통령은 15일 발표된 복지부의 건강대책에 대해 언론이 문제를 삼자 심기가 불편해진 듯하다. 복지부의 건강대책은 전체적으로 보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가 분명치 않다. 그렇다면 언론은 "예산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혹시 대선 선심용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이젠 부처를 출입하는 개별 기자들까지 거론하며 언론을 헐뜯는 노 대통령이 안쓰럽다. 노 대통령이 다른 국정 운영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건지 걱정도 된다. 혹시 온통 잘못된 정보와 터무니없는 근거에 기초해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건 아닌가.

정철근 사회부문 기자 (보건복지부 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