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개헌 두 번 하고도 남는 시간이라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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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지 않은 우리의 경우 민주정치의 성공적 제도화를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비롯한 과감한 개혁의 논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헌법 개정에 관한 논의란 어떤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개헌의 내용에 못지않게 민주정치의 안정적 발전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헌은 내용 못지않게 그 시기와 추진 방법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에 문제점이 있고 특히 권력 구조와 선거 제도에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은 많은 전문가와 국민이 다 같이 지적해 왔던 바다. 지난해 4월에는 헌법 개정의 고비마다 비교적 중립적이며 객관적 토론의 장을 마련했던 관훈클럽.한국정치학회.대화아카데미 등이 이른바 '1987년 헌법'의 개정 가능성과 방향에 대해 진지한 검토의 모임을 연달아 가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도 개헌의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됐으나 권력 구조 및 대통령의 임기 등을 포함한 전면적 개정을 시도하기에는 이미 시기적으로 때를 놓쳤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다음 대선을 20개월 앞둔 시점에서 나온 결론이다.

대통령의 제안에서 나왔듯이 선거 주기의 불일치에서 오는 문제만이라도 개선하려 5월 이 칼럼에서는 궁여지책의 이른바 단일조항 개헌안을 제기하기도 했다. 16대 대통령과 17대 국회의 임기가 2008년 봄, 거의 같은 시기에 끝난다는 절호의 기회를 감안해 17대 대통령의 임기는 4년 단임으로 한다는 단일조항 개헌으로 선거 시기 불일치 문제를 일단락 짓자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48년 5월에 시작된 '제헌국회'로부터 꼭 60년이 되는 2008년, 18대 총선은 광범위한 헌법 개정 작업을 우선 임무로 하는 '개헌국회' 선출의 기회로 삼자는 제안이었다. 이러한 제안이 나온 것은 전면적 개헌 시기는 이미 늦었지만 선거 주기의 불일치에서 오는 국정의 불안만이라도 해소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 정권은 1년 전까지도 개헌 논의는 시기가 늦었다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대통령 선거를 겨우 11개월 앞둔 시점에서 내놓은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개헌 제안에 대해 국민이 갖는 놀라움과 배경에 대한 의구심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우리 국민의 반응은 절대다수가 개헌 논의는 바람직하나 그 시기는 다음 정권으로 넘겨야 한다는 것으로 이미 모든 여론조사에 나타나고 있다. 민주정치는 순리의 정치일 때만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그러기에 헌법 개정은 많은 국민과 시민단체.정당.국회에서의 논의된 결과로 추진돼야지 대통령의 독단에 의해 발의되는 것은 순리라 할 수 없다.

민주정치의 책임성과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올려 보고 싶은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라면 국민들도 이번 기회를 한국 정치의 건전성을 검증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무작정 직선 대통령에게 모든 힘을 실어 주려는 우리 국민의 정서도 심각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취임 직후 그를 당선시킨 정당에서 탈당한다면 국민으로선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세계적으로 안정된 민주국가들은 대부분 의회 중심의 내각제로 운영되고 있는 반면 성공적으로 민주 체제를 지켜 나가는 미국 외에는 대다수의 후진 체제들만이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점도 우리 정치의 선진화를 위해 재고해야 하는 시점에 이른 것 같다. 아무튼 개헌은 다음 정권에서가 아니라 다음 국회에서, 즉 국민이 선출한 입법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굳혀 가야 될 것이다.

지난 며칠의 개헌 논의도 결국은 참여정부 시작부터 제기된 국정의 우선순위의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 새해 들어 갑자기, 지금 국민에게는 헌법 개정이 우선순위 제일의 국가 과제가 됐다고 올인할 만큼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없단 말인가. 개헌 제기로 문제 제기는 됐다. 이제 대통령은 시급히 당면한 국정 과제 처리에 전력투구하는 자세로 돌아가 주길 바란다.

이홍구 본사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