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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日食 열풍…일식집 30분 줄서도 문전성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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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사회주의 혁명기념일(7일, 지금은 '합의와 화해의 날'로 개칭) 연휴가 이어지던 8일 오후 크렘린에서 멀지 않은 모스크바 최대 중심가 '트베르스카야'거리. 연휴를 맞아 시민 대부분이 교외로 나간 데다 싸늘한 겨울비마저 뿌려 거리는 평소보다 훨씬 한산했다. 길 양옆으로 늘어선 상점들을 찾는 손님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런데 유달리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있었다. 바로 스시바 '긴노 다키'다.

생선 초밥과 회, 튀김 등을 전문으로 하는 일식 체인점인 이 가게 앞에는 외제차들이 빽빽하게 주차 중이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온 손님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2층에 걸쳐 1백석이 넘는 자리가 꽉 차 버린 것이다. 매니저 세르게이는 "자리가 나려면 20~3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주말이나 휴일은 오후 3시 이후, 평일은 오후 6~7시 이후면 줄을 서는 게 보통이란다. 어쩔 수 없이 임시 의자를 잡고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식당 한쪽의 트인 주방에서는 하얀 일본식 조리 가운을 입은 보조요리사 3~4명이 초밥을 마느라 여념이 없다. 대부분이 '고려인'으로 불리는 한국계 러시아인이다. 주방장만 일본인이다. 홀에서는 역시 가운 모양의 일본식 복장을 한 자그마한 키의 러시아 여급사들이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했다.

세르게이는 "동양적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 일부러 키가 자그마하고 온화한 스타일의 러시아 아가씨들을 골라 뽑았다"고 귀띔했다. 일식당은 웬만한 직장에 비해 벌이가 뛰어나 젊은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자리 가운데 하나다. 손 큰 러시아인들이 주는 팁이 주수입원이다. '사케'로 기분이 얼큰해진 고객들은 몇 백 달러인 음식값의 30~50%를 봉사료로 주는 경우도 자주 있다. 여종업원들의 월수입은 그래서 최근 모스크바 평균 임금 수준인 4백~5백달러(50만~60만원)를 훨씬 웃돈다.

연인.친구.가족 등과 식탁에 앉아 어색하게 젓가락질을 하는 손님 대부분은 20~40대의 청.장년층이다. 특히 여성들이 많다. 직장에 다니는 친구 3명과 스시바를 찾은 회사원 엘레나(37)는 "러시아 음식에 비해 양이 적고 칼로리도 높지 않아 살찔 부담이 없는 데다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음식값은 결코 싸지 않다. 생선 초밥이 개당 1.5~2달러, 모듬초밥은 25달러까지 한다. 회는 종류에 따라 접시당 5~8달러, 모듬회는 20달러 정도다. 보통 적당히 한끼를 먹는 데 1인당 30달러는 기본이다. 대중적인 일식당을 자처하며 중간층을 타깃으로 한다는 '긴노 다키'와 '야키도리야' 등이 이 정도다. 고급 일식집은 이런 곳의 4~5배에 이른다. 그런데도 손님들은 넘쳐난다. 세르게이는 "평일엔 6백~7백명, 휴일엔 1천명 이상이 찾는다"고 밝혔다.

최근 2~3년새 모스크바의 일식당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시내에 야키도리야가 11개, 긴노 다키가 2개의 분점을 열었다. 이밖에 '이주미' '야쿠자' '사무라이' '사쿠라' 등의 간판을 단 스시바.일식집 등이 주요 길목마다 자리잡고 있다. 요식업 관계자들은 모스크바 시내에만 1백개가 넘는 일식당이 성업 중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일본 열풍은 다른 분야에서도 뜨겁다. 최근 일본식 종이 부채와 부처상 등의 기념품이 생일이나 명절 선물로 큰 인기다. 이 같은 액세서리들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스포츠 센터들에는 가라테와 합기도를 배우려는 러시아 젊은이들이 몰린다.

일본 신세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작가 가운데 한명이며,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영화를 보려는 관객도 줄을 잇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익숙한 유럽 문화 외에 색다르고 고급스러운 동양 문화를 즐기려는 욕구가 높아지면서 일본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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