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정진우 조감독 때 대작 뒷바라지 단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정진우(1938년생)는 20세도 안된 나이에 『해정』(56년·박상호 감독)에서 촬영조감독(세컨드)을 한다. 연출 조감독을 하고 싶었으나 아무도 안 써줬다. 당시의 이동차는 광산이나 토목공사장에서 쓰는 운반광차의 쇠 바퀴 위에 판자를 놓고 촬영기를 설치, 그것을 밀고 끄는 것이었다.
대학연극부 친구들이 구경왔다 가더니『진우 자식 영화판 2년이라 더니 촬영 구루마 밀고 끄는 일하더라』는 소문이 났다. 그것이 촬영 조감독이 하는 일이었다.
이때쯤 홍찬의 수도영화 1기생 이대엽·김영효·방수일등이 들어온다. 처음 공채로 뽑은 배우들이다. 수도영화의 촬영소장은 유한철이었고 기획실장은 허백년이었다. 『장미는 슬프다』·(58년·박상호 감독), 『생명』(58년·이강천 감독)등을 촬영하며 렌즈의 포커스 맞추는 법을 터득하고는 촬영 퍼스트가 되었다.
변인즙 기사 밑에서2년쯤 있다가 홍성기·노비 등 감독작품에선 제작부장을 했다. 그러자 정창화 감독의 퍼스트 강대진이 나가 임권택과 함께 퍼스트로 그 자리에 들어간다.
『지평선』(61년·정창화 감독) 때엔 제작부장을 겸했다.
그후 정창화 감독의 대작 『장희빈』(61년), 『칠공주』(62년), 『대지의 지배자』(63년)가 계속된다. 한 컷트안에 말 1백마리가 나오는 준비는 다 정진우가 했다. 이때쯤부터 대작촬영 때엔 정진우를 불러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정진우라야 그 많은 등장인물과 물량을 일시에 움직일 수 있다고 영화판에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창화 감독이 편당 연출료 35만환을 받고 보통 감독이 15만환 받을 때 정진우는 퍼스트조감독으로 30만환 받았다. 그는 일종의 직업조감독으로 팔리고있었던 것이다.
한창 일할 때엔 4개월 동안 사무실에서만 잔 적도 있다.
정진우는 『싸우는 사자들』로 독립해 데뷔할 예정이었다. 임권택이 동문의 우정으로 조감독을 맡기로 했다.
그 다음 임권택 데뷔작에는 정진우가 조감독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5·16이 나면서 정진우는 말 잘못했다고 잡혀가 3개월20일만에 군사재판을 받고 선고유예로 나온다.
임권택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62년)에선 약속대로 정진우가 조감독 했다.
정진우 데뷔작『외아들』(63년·김지헌 각본)에선 임권택이 조감독을 자원했으나 새삼스러워 거절했다. 정진우와 임권택의 우정은 아직도 끈끈하게 계속된다.
이 무렵 이만희가『주마등』(61년)으로 데뷔했는데 거기에 출연한 황정순이 『외아들』에 출연하면서 이만희의 연출력을 굉장히 칭찬했다.『외아들』엔 최무룡·김지미가 출연했다. 김지미는『장미는 슬프다』(58년)출연당시 정진우를 오빠라고 불렀다. 그후 홍성기 부인이 됐을 때는 정진우의 사모님이 됐고, 최무룡 부인이 됐을 때는 형수가 됐고. 그후엔 호칭이 밍크엄마가 됐다.
정진우의 제2작 『배신』(64년)엔 엄앵란·신성일이 출연했다. 엄앵란 역시 정진우를 오빠라고 불렀는데 그 당시 유이한 학사 영화인이었다. 하루는 신인 신성일이 2시간 지각해서 나타나 응징의 방법으로 11월의 차가운 강물 중턱에서부터 헤엄쳐 오라고 했다. 강가에 도달하면 여자가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있는 장면이었다. 혼내주느라 헤엄쳐오라고 한데까지는 좋았으나 그 장면을 드라마 속에 연결하느라 애먹었다. 11월 강물에서 나온 신성일이 안쓰러웠던지 엄앵란이 자기 차로 그를 데리고 워커힐에 갔다가 친해져 결혼한다.
『목마른 나무들』(64년)을 만들고는 너무 자신이 없어 있는 돈 다가지고 부산까지 가 자살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간성까지 올라와 전화해 봤더니 빨리 다음 작품 준비하자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왔다.
『무정의 40계단』(65년)은 다른 두 사람과 동업제작 했는데 그들이 수익금을 모두 챙겨 달아나 정진우는 빚만 지게되었다·빚 갚기 위한 궁여지책으로『8240KLO』(66년), 초우』(66년), 『하숙생』(66년), 『악인사대』(66년)4편을 4개 사로부터 돈 받아 찍기 시작, 동시진행 4개월만에 촬영을 끝냈다. 무모한 짓이었지만 이때 4편 다 작품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임영(영화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