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잘 돼 있는데 정치 잘못 섣부른 개헌, 혼란 부를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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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학계의 원로인 김철수(74) 명지대 석좌교수는 9일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대해 "사회적.정치적 여건의 성숙 없이 섣불리 개헌 논의를 꺼냈다간 추스를 수 없는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김 교수는 "4년 연임제 못지않게 5년 단임제도 장점을 갖고 있다"며 "5년 단임제에선 대통령이 소신대로 갈 수 있지만 4년 연임제에선 대통령이 첫 임기 4년 동안 인기영합 정책만 펼 가능성이 많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대통령이 정치적 불안을 헌법 탓으로 돌리는데 사실 헌법은 잘 돼 있지만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 해서 그런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노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 내용에 대한 평가는.

"4년 연임제 주장은 그동안 여러 사람이 해 왔고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4년 연임제가 될 경우 첫 당선자는 정책을 국가적 차원에서 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재선에 유리한 쪽으로만 끌고 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대통령이 재선 걱정 없이 소신대로 갈 수 있는 5년 단임제보다 못한 결과가 된다. 또 연임제에서 4년 임기 뒤 중간평가를 받는다고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과연 공정한 선거가 치러질지도 의문이다. 현직 대통령이 대선에 나오면 지난 탄핵 정국처럼 권력이 언론을 장악해 국민을 선동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현행 1987년 헌법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당시 현실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5년 단임제가 특히 그렇다. 국민이 원해 대통령 직선제를 선택했다. 직선제 대통령은 독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단임제로 독재를 방지한 것이다. 또 헌법재판소가 생겨 국민의 권리가 보장됐다. 87년 헌법은 어느 나라 헌법보다도 국민 기본권 보장 측면에서 아주 잘 된 것이다."

-5년 단임제는 장기집권을 막기 위해 도입한 기형적 제도이므로 더 이상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소장학자들 가운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과거 역사를 잘 모른다. 이승만 대통령이 왜 3선 개헌하고 4선을 했나. 집권세력들이 권력을 내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도 3선 개헌을 하면서 이번까지만 하고 끝내겠다고 약속을 했다. 언제나 말은 그럴 듯하다. 또 현행 단임제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달라 낭비적 요소가 있다고 얘기하는데 총선 자체가 중간평가라고 보면 된다."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한 배경과 의도는 뭐라고 보나.

"노 대통령의 '던지기 식'정치다. 대연정 제안처럼 국가적 중대사를 그냥 툭툭 던지듯이 꺼낸 것이다. 이번 제안은 개헌 국면으로 전환해 정계개편을 하자는 것이다. 임기가 끝나가는데도 자신의 권력이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의도다. 하지만 개헌은 다음 대통령 첫 임기에서 논의되는 게 옳다. 오늘 담화에서 2002년 대선 때 개헌이 공약이었다고 말했지만 사실 노 대통령은 당시 프랑스식 '이원집정부제'를 만들겠다고 약속한 거지 4년 연임제를 약속한 게 아니다."

-정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순수한 의미의 개헌이 이뤄지려면 선결 조건이 뭔가.

"정권이 명분을 쌓은 뒤 국민과 야당의 동의를 얻는 것이다. 특히 한국 정치에선 야당의 협조와 찬성이 필요하다.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들도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면 개헌에 찬성할지 모른다. 그러나 차차기를 노리는 그룹에선 4년 연임이 너무 길다고 볼 것이다. 그래서 야당의 내분이 생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개헌에 필요한 국회 재석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는 얻기 힘들어진다."

-'원포인트 개헌'이 현실성이 있을까.

"개헌 논의는 '판도라의 상자'와 같다. 원포인트 개헌만 하기는 힘들다. 여론 형성에 따라 내용에 뭐가 담길지 모른다. 각 집단에서 한꺼번에 여러 요구를 쏟아내면 큰 혼란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일부 진보세력들은 통일헌법을 주장할 가능성도 높다. 헌법 3조(영토조항)와 4조(평화통일 조항)의 수정을 꾀할 것이다."

-내각제 개헌 주장도 나올 수 있는데.

"내각제에서 여야는 극한 대립을 안 하고 타협이 가능하다. 연립정부 형성도 가능하다. 대통령제 아래에선 일단 당선되면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제멋대로 정치하는 것이다. 한국 정치의 위기는 대통령의 '독식'에서 비롯됐다. 내각제의 이미지가 안 좋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내각제의 부정적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각제에서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

이철재 기자

◆김철수 석좌교수=헌법학계의 원로. 서울대, 독일 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 미국 하버드대 등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서울대 공법학과 교수를 거쳐 2002년 명지대 석좌교수로 옮겼다. 1970년대 유신헌법을 비판하다 면직위기를 겪기도 했다. 김 교수의 '헌법학 개론'은 법대생의 필독서다. 현재 헌법재판소 자문위원회 부위원장과 한국헌법학회 고문을 맡고 있다.

◆개헌 발의권=헌법 개정안을 낼 수 있는 권한은 국회와 대통령에게만 있다. 잦은 개헌으로 헌법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헌법 제128조는 국회의원 과반수가 헌법 개정안을 발의하거나 대통령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개헌안을 내도록 했다. 1954년 헌법에선 민의원 선거권자 50만 명이 찬성할 경우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했지만 62년 5차 개헌 이후 유권자의 개헌안 발의권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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