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만나보니…(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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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자네,준식이 아닌가.』
『그래,자네 상규 맞지.』
8일 오후 6시쯤 연세대 의대 본관회의실.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검안을 마치고 어색한 표정으로 X­레이 판독결과를 기다리던 검사와 대책회의 관계자들이 갑자기 손을 맞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검안을 지휘하기 위해 나와 있던 서울지검 강력부 신상규 검사(43),대책회의 관계자로 나온 서준식 전민련 인권위원장(43)·최규성 서울민통련 부의장(43)·채만수 민족민주운동연구소장(43) 등 4명이 모두 서울대 법학과 68년 입학동기생들이었던 것.
특히 신검사와 서위원장은 학교를 졸업한지 20여년만에 처음으로 만난 사이여서 한동안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신검사는 졸업후 79년 사법시험에 합격,검사가 됐으나 서위원장은 재학중 구속돼 장기간 복역하느라 그동안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서위원장은 일본에서 태어나 고교졸업후 모국으로 건너와 판·검사의 꿈을 키우며 공부하던중 졸업을 몇달앞둔 71년 4월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사건」으로 88년 5월 석방될 때까지 17년간을 복역했던 대표적인 장기수중 하나였다.
서위원장은 『그동안의 세월탓인지 많이 변해있어 신검사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며 『신검사는 학교다닐 적에 대의원을 맡는등 굉장한 활동가였으며 학구파였던 친구로 기억된다』고 회상하듯 말했다.
신검사도 『준식이가 모국어는 서툴었지만 모국을 알려는 열의가 대단히 높았던 친구였다』며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들이 동문수학했던 시절은 69년 3선개헌,70년 전태일 분신과 교련반대시위,71년 대통령선거 등 뜨거운 쟁점이 잇따라 대학가가 계속 술렁이던 때였다.
고락을 같이했던 동기생들이 검사와 재야인사로 갈라지긴 했지만 20대 젊은 시절 대학캠퍼스에 수놓았던 우정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반가운 인사도 잠시뿐,경색된 최근 시국때문인지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이들은 양쪽의 입장만을 확인한 뒤 서로 총총히 헤어져야 했다.
이들의 헤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한 캠퍼스에서 우정을 쌓으며 함께 배우고 있는 대학생들이 20년 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인가」 문득 궁금해졌다.<홍병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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