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4)제85화 나의 친구 김영주(2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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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일군 무장해제>
중령과 소령 각 2명, 대위 1명(대위로 위장한 필자)으로 짜인 우리 무장해제 접수 대표단은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주주시에서 예비회담을 마치고 사단으로 돌아왔다. 9월14일 (1945년)의 일이었다.
곧 사단장 소중광 소장과 참모장 왕용덕 대령이 임석한 참모회의에서 예비회담 사항이 보고되었다.
무장해제의 격식과 순서는 중국대륙 어느 지역이나 똑같이 중·일군 합의하에 미리 그 형식이 짜여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예비회담은 그것을 확인하는 정도여서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군 간부들은 일본군 무장해제가 그리 순조롭지 못할 것이라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엊그제까지 「짱꼴라, 짱골라」하면서 중국군을 깔보던 일본군이 호락호락 중국 군에 무기를 내주고 항복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들이었다. 중국 최고 사령부에 집계된 정보를 봐도 「항복하느니 차라리 옥쇄하자」 「최후 일병까지 싸우다 죽자」는 등 여러 가지 소리가 난무했고 중국파견군 총 사령관 오카무라(강촌령차) 대장이 자결할 것이라는 소문도 그간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육사 출신으로서 일본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왕 참모장은 벌써부터 오카무라의 자살을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자살한다면 중국에 었는 백만 대군의 지휘계통이 문란해질 뿐만 아니라 항복을 반대하는 일본군이 여러 곳에서 항전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또 모택동군에 무장해제를 당하는 일본군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내전에 빠질 것이 뻔한 일이었다.
오늘 아침 일본군 점령지역인 주주시로 우리 무장해제 접수단이 떠날 때도 왕 참모장은 『일본 독종들이 발작적으로 일본도를 뽑아들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당부했었다. 사실 위급한 일이 있을까봐 나에게 걱정을 실토하는 대표도 있었다.
대체로 중국인들은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것 같았다.
아침에 소중광 사단장은 내 가슴에 부착돼있는 청색 대위 계급장을 보더니 『아주 위장을 잘했구만.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절대로 말하지 말게』하며 당부했다.
그때 내가 제안하기를 일본측 통역이 일본인이거나 중국인일 경우는 내가 통역하겠지만 만일 저쪽 통역이 한국인일 경우, 그것도 나보다 월등히 중국말을 잘할 경우 나는 통역을 하지 않고 그 대신 그들끼리 주고받는 얘기만을 참고삼아 잘 들어두겠다고 했다.
왜냐하면 일본측 통역이 중국인이거나 일본인일 경우 그들은 나의 중국말이 좀 서툴더라도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을 간파 못하지만 나보다 월등히 중국말을 잘하는 조선사람이라면 금방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측은 만일에 대비해 일본군 내부사정을 소상하게 알려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었다. 그런 조선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회담장에 당도하니 동족끼리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첫눈에 척 들어오는 것은 계급장을 달지 않은 한 청년이었다. 그는 틀림없는 조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본참모들도 그를 「김 통역, 김 통역」하는 것이 아닌가. 중국인 중에는 김씨가 거의 없다. 그리고 회담이 시작되자 김 통역의 발음 속에는 아주 강한 평안도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틀림없는 우리동족임을 나는 확신했다.
나는 곧 회담장에 앉아있는 우리일행에게 쪽지를 돌려 그가 틀림없는 조선인이라고 알렸다. 그리고 더 관찰해 보고 틀림이 없으면 그를 포섭하여 우리들이 궁금한 여러 가지 임무를 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모두 찬성이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천황이 종전방송을 했다는 대목에서 김 통역은 「일본천황」이라고 통역하지 않고「일본추장」이라고 통역하는 것이었다. 「추장」이란 야만인들이 사는 곳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또 그는 「일본」을 「동양삼도」라고 통역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3개 섬으로 구성된 하찮은 섬, 나라라는 뜻으로 중국사람들이 일본을 미워하고 천대해 부른 명칭이었다. 그가 일본사람이라면 어찌 감히 자기네 천황을 추장이라고 하겠는가. 이제는 더 관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가 조선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그에게 줄 임무가 있었다. 비밀리에 그를 포섭하고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었다. 그것이 김영주와 나의 해후였던 것이다. 일은 차차 재미있게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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