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문화읽기] CF의 SF영화 흉내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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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현란한 이미지 편집과 강한 메시지. CF광고는 15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그 강렬한 인상만큼은 한편의 영화 못지 않다. CF는 제품의 특성에 맞게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영화의 장르 관습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첨단 전자제품의 광고에 SF가 차용된 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SF 스타일의 광고는 1984년 미국 프로 미식축구 챔피언 결정전인 수퍼볼 게임 때 미국 전역에 방송된 애플 컴퓨터 광고라 할 수 있다. 회색빛 삭막한 미래도시를 배경으로 무표정한 사람들이 잿빛 제복을 입고 줄지어 걸어간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어느 강당. 거대한 스크린에 빅 브라더의 얼굴이 나타나 그들을 맞이한다. 이때 한 젊은 여성이 갑자기 스크린을 향해 달려들고 경찰관들이 그를 진압한다. 그는 위압적인 빅 브라더의 영상이 담긴 스크린을 향해 해머를 던지고 스크린은 산산조각이 난다. 이때 넋이 나간 청중을 휘감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1월 24일, 애플 컴퓨터가 매킨토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해서 현실의 1984년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과 다르게 되는지 알게될 겁니다'.

애플 컴퓨터의 신제품을 광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광고를 연출한 사람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만든 감독 리들리 스콧. 당시 세계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이 보여준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리들리 스콧은 이 점에 주목해 컴퓨터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IBM을 빅 브라더에 비유하고 IBM과 싸우는 애플 컴퓨터를 저항군에 비유해 CF를 만든 것이다. 이 광고는 수퍼볼 게임 방영 때 단 한 차례 전파를 탄 뒤 다시는 방영되지 않았지만, 그 효과만큼은 엄청났다. TV에서 수퍼볼을 지켜보던 수백만명의 시청자들을 압도했을 뿐 아니라 그날 밤 뉴스 프로그램들이 이 광고를 기사화하면서 미전역에 다시 재방송된 것이다. 그 효과만큼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CF와 SF의 만남을 TV에서 보곤 한다. 영화 배우 이승연이 사실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특종 기사로 내보내는 어느 스포츠신문 광고는 '맨 인 블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고, 화성인들이 지구를 점령했다가 어느 회사의 콜라를 마시고 행복해져 돌아간다는 광고는 영화 '화성침공'을 패러디한 것이다. 이 외에도 컴퓨터나 오디오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미래형 전사들이나 회색빛 도시이미지들도 SF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SF에 가장 중요한 정신은 과학기술의 틀 안에서 인간의 위상을 고민하는 것. 따라서 단지 눈요깃거리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제품 광고 속에 담겨 있을 때 SF스타일의 광고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첨단제품들의 광고가 앞으로 점점 늘어나 감동적인 SF를 광고 속에서 맛볼 날을 기대해 본다.

정재승 고려대 물리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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