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대롱으로 타자기 치는 시인 한미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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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산맥처럼 누웠어도 마음은 훨훨/전신마비 장애인 「나의 입」/84년 결혼 한달앞두고 윤화 날벼락/입에 붓물고 그림도 그려
『산맥처럼 누워사는/있으나 없는 몸/긴 한숨 동반한 신음은/비가 되어 내리고/눈이 되어 내리고.』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 장애인이 한획 한획 입에 질끈 문 붓대롱으로 타자기의 자판을 찍어 시의 언어를 엮어낸다.
장애인으로서 고통과 슬픔의 나날이 주옥같은 시어로 승화돼 탄생한 베스트셀러 시집 『땅에서도 하늘을 살아요』의 작가 한미순씨(37·여·서울 상도4동 203의 19).
지난해 7월 발간된 한씨의 처녀시집 『땅에서도… 』는 그동안 5천부가 팔려 현재 2판을 찍고 있다.
『한씨의 시가 감동을 주는 것은 기도와 생명으로서의 말씀이 시로 형성되어 가슴에 깊숙이 젖어들기 때문』이라는 시인 정공채씨의 평.
한씨도 『인간의 출생 자체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정상인일때 어느 누구보다 억척스럽고 욕심스럽게 삶을 살았다』며 『비록 몸을 쓸 수는 없지만 그 삶의 욕구는 죽지 않아 그림을 그리게 했고 시를 쓰게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충남 부여에서 단신상경,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방송통신대학강의를 들으며 또순이처럼 살던 한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결혼식을 한달 앞둔 84년 10월. 골목길을 과속으로 달리던 봉고차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진단은 목뼈의 중추신경 손상에 따른 「전신지체마비」.
1주일만에 의식을 되찾았으나 정신은 말짱한데 손가락 발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새색시로서의 꿈도,교사가 되겠다는 희망도 모두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결혼을 약속했던 약혼자도 한씨를 버렸다. 사고차량이 보험에 가입돼있지 않아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1년반을 병원에서 보낸 한씨는 퇴원을 앞두고 앞길이 막막했다.
우선 지낼곳은 평소 다니던 교회로 정했지만 평생을 남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씨는 교회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익히기 시작했다.
근정 박진환화백(51)은 한씨의 의지에 감동,그림지도를 자청했다.
봉사자들이 몸을 의자에 앉혀주고 화선지를 책상위에 펴놓으면 붓대롱을 입에 물고 목근육만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다보면 침이 입밖으로 흘러나와도 닦지 못하고 입술이 아파 견딜 수가 없게 되죠.』
한씨는 각고의 노력끝에 지난해엔 세계구족화가 연맹에 가입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늘어 지금은 그림이 주요 생계수단이 되고 있다.
세계연맹이 매달 보내주는 지원금과 그림을 선물받은 사람들이 주는 사례비를 포함한 40만원정도가 한씨의 월수입이다.
『그림이 어느 수준에 이르자 시도 한번 써봤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붓대롱으로 타자기를 누르면 창작작업이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다 지치면 시상을 모아 한편 두편씩 써온 시들이 한권의 시집이 되어 빛을 보게된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한씨는 신앙심으로 절망을 극복했다.
『전날에는 나도/현란한 세상옷을 입고 꽃이라 불리었소/얼굴 간지르다 지나가는 바람의 허무에도/교만한 꽃잎 나풀거리며/고운 모습 치장하기 바빴더랬소.』(『꽃』중에서)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어 「교만한 꽃잎」은 떨어졌으나 한씨는 「시들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꽃」이 되겠다는 희망을 안고 산다.<이효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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