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무원들 비리, 혁신만능주의에 빠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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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퇴임을 앞둔 한 공무원이 공무원 사회의 온갖 부정과 부조리 사례를 고발하는 책을 펴냈다. 책에는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들이 저지른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 적지 않다. 택지개발 정보가 공무원들에 의해 사전에 줄줄이 새 나가는가 하면, 방송국의 로비로 시청료가 터무니없이 과다 책정되기도 한다. 재정 고갈이 뻔한 국민연금 계획을 선거공약이라는 이유로 밀어붙이고, 매년 엄청난 액수의 판공비와 출장비가 '가짜 공문'을 통해 공무원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 심지어 산업자원부의 한 차관은 당시 1000원이면 만들 수 있는 명패를 일하느라 바쁜 부하직원을 동원해 200만원을 들여 만들었다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

물론 책에 포함된 내용 중에는 과거의 사례가 많고 지금은 공무원 사회도 많이 개선됐다. 하지만 이런 식의 낭비와 부정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민은 해마다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사건을 보면서 여전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씻지 못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정부 출범 이후 공직사회의 강령처럼 돼버린 이른바 '혁신운동'이 오히려 공무원들이 제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비효율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공무원들이 본래 업무를 제쳐놓고 '혁신과제'에 내몰리고 있다며 이 정부의 혁신을 '우수마발의 혁신'이라고 비판했다. 그저 청와대에 잘 보이기 위한 혁신, 코드 맞추기 혁신, 승진만을 위한 혁신일 뿐이란 얘기다. 공무원들이 일은 안 하고 온통 형체도 불분명한 '혁신과제'를 찾아다니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공직사회의 많은 공무원이 여전히 박봉 속에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공무원들을 혁신이니, 코드니 해서 휘저어 놓으면 남는 것은 좌절감과 무사안일, 그리고 부정부패에의 유혹뿐이다. 이들이 정권의 강령에 휘둘리지 않고 보람을 느끼며 일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