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보는 쿠르드족의 눈/박준영 뉴욕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터키와 이란 국경으로 피난중인 이라크의 쿠르드족에 대한 미국등의 긴급구호물자 공수가 시작되었다.
이라크군의 공격을 피해 산악지대로 옮겨가고 있는 이들에게 미군수송기들이 식품과 식수·반창고등 의약품을 떨어뜨려 주는 모습이 미국 텔리비전에 잇따라 보도되고 있다.
이들 보도가운데 인상적인 것은 미국 구호품을 받는 쿠르드족 난민의 표정이다.
그 가운데서도 기력을 잃고 축늘어진 어린이를 한손에 안고 다른 한손으로 미국빵을 받아가는 한 쿠르드여인의 표정은 그들의 복잡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고마움보다는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그녀의 표정은 절망의 체념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분노와 배신에 대한 아픔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걸프전후 이라크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산악으로 피난하고 있는 쿠르드족은 3백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수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미국 정부 및 미 언론들은 미국의 구호활동을 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이를 지켜보는 제3자의 눈에는 미국인들의 자기만족의 표시와 심리적 갈등을 순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만 비친다.
쿠르드족이 이라크 정부에 반항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 반기를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국민들에게 후세인 타도를 부추긴 때문이라는 것이 많은 미국 식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그러나 정작 쿠르드족이 회교시아파와 함께 반후세인 봉기에 나서자 미국은 내전불개입을 선언했다가 심지어 이라크정부군에 반군진압을 직간접으로 시사하면서 반군에 대한 도덕적 지지마저 거부했었다.
수많은 생명을 잃고 굶주림과 질병에 허덕이며 민족대이동을 하고 있는 쿠르드족에 미국이 긴급구호에 나선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당장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쿠르드족 난민들은 빵과 약품이 고마워 미국의 배신이나 강대국의 현실정치놀음을 비난할 힘도 잃고있을지 모른다.
죽어가는 모습의 어린아이를 한손에 안고 다른 한손으로 미국빵을 받아드는 쿠르드여인의 무표정에서 국제사회에 친구가 없어 2천5백년간 나라없는 설움을 간직하며 살아온 쿠르드족의 역사와 냉철한 국제 정치의 현실을 읽게 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