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푸틴 앞에서 작아지는 EU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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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러시아 앞에서 유럽이 또 한번 침묵했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지난 주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가 EU의 순번제 의장 자격으로 EU의 공식입장과는 달리 체첸과 유코스 사태와 관련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폭 지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뿐만 아니라 비난성명은 로마노 프로디 집행위원장이 아니라 대변인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그만큼 비난의 수위는 낮은 셈이다.

베를루스코니 총리 측은 즉각 반격을 가했다. 한마디로 "푸틴 대통령 앞에서는 아무 말 안 하다가 그가 가고 나니까 왜 딴소리냐"는 얘기다. 그 말은 결코 틀린 게 아니다. 전날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EU-러시아 정상회담에서 푸틴 대통령을 자극할 만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어느 정상도 체첸과 유코스 사태를 직접 거론하지 못했다.

크리스 패튼 EU 대외관계 담당 집행위원은 체첸의 인권문제에 대해선 인도적 구호와 비정부기구(NGO)들의 용이한 접근을 촉구하는 선에서 그쳤다.

게다가 다음날 파리에서 푸틴과 회담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극히 이례적으로 공항까지 따라나가 배웅했다. 엘리제궁 측은 정상회담에서 체첸과 유코스 사태를 논의했었는지 밝히기를 거부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성명에 대한 논평도 사양했다. 영국과 독일 역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스웨덴과 덴마크가 뒤늦게나마 "EU는 러시아가 체첸에서 인권침해를 하지 않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뿐이다.

유럽의회의 패트 콕스 의장은 EU의 이 같은 침묵에 대해 깊은 유감과 우려를 표시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푸틴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유럽의 수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유럽의 막대한 교역량, 러시아에 대한 유럽의 높은 석유 의존도,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러시아 앞에 서면 늘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게 유럽의 현실이다.

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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