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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멜로죠, 그러나 결코 징징대지 않는 …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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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솔직히 이처럼 강단 있고 색깔 있고 오래가는 배우가 될 줄 몰랐다. 염정아(34) 얘기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미스코리아 출신의 미녀 탤런트 이상의 이미지는 아니었으니까.

이런 미안한 질문에도 "맞다. 이제껏 나를 도드라지게 해주는 배역을 못 만났다. 사실은 내 탓이 제일 크지만"이라며 호탕하게 받아넘긴다.

그녀가 재발견된 것은 김지운 감독의 명품 호러 '장화, 홍련'부터다. 히스테리컬한 계모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은 후 최동훈 감독의 야심 찬 스릴러 '범죄의 재구성', 초등생 제자와 연적이 되는 코미디 '여선생 여제자', 코믹 판타지 '소년 천국에 가다'등에서 '배우 염정아'라는 브랜드를 공고히 했다. 유혹적인 팜므 파탈에서 망가짐을 불사하는 코미디, 일상 연기를 오가는 폭넓은 행보다.

그녀가 새 영화 '오래된 정원(1월 4일 개봉)'을 선보인다. '바람난 가족''그때 그사람들'로 논란을 불사해온 임상수 감독 영화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수배 중인 운동권 학생 현우(지진희)가 자신을 숨겨준 미술교사와 사랑에 빠지는 멜로다. 염정아가 맡은 미술교사 한윤희는 황석영 원작 소설보다 비중이 훨씬 커졌다. 남자와 시대를 끌어안는 성숙한 여성으로,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는 인물이다. "멜로의 흔한 캐릭터가 아니어서 좋았다"는 그녀를 만났다. 30일 결혼을 앞두고도 바쁜 홍보일정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임상수 감독 영화라, 여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워낙 표현이 세서 여배우가 용기를 많이 내야 하는 감독님이다. 그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었다. 이번에는 노출 수위도 낮고 원작도 좋고 망설일 게 없었다. 무엇보다 멜로 여주인공으로 흔치 않은 캐릭터라는 게 끌렸다."

-한윤희를 어떻게 이해했나. 멜로지만 정치적 성격이 강한데.

"'이 역할을 하는데 정치적 견해는 필요 없다'는 게 감독님 말씀이었다. 나 역시 정치적 견해는 배우보다는 감독의 몫이고 나는 윤희의 감정만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윤희는 넓은 마음으로 남자를 포용할 수 있는, 당당한 여자다.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징징대지 않는 여자. 윤희를 연기하면서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이 있다는 걸 확인한 것도 좋았다. 진짜 성숙한 여자의 모습 말이다."

-그래도 80년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을 텐데.

"TV다큐 같은 자료를 많이 봤다. 물론 대학 때도 데모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정치에 관심없는 편이어서 그저 남의 세상 얘기라고만 생각했다. 이제와 그 시대를 돌아보면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시대고,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름답고 충분히 이해되지만, 자기를 불사르는 것은 아니지 싶다. 어떻게 보면 윤희의 시선이 바로 내 시선이다."

-연기의 포인트는 뭐였나. 힘들었던 대목은.

"감정을 한군데 쏟아붓기보다 윤희의 마음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이런 게 겉으론 쉬워 보여도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클라이맥스인 윤희와 현우가 빗속에서 헤어지는 장면을 맨 마지막에 찍었는데, 한겨울에 여름비처럼 보이느라 엄청 고생했다. 극중 직업이 미술교사라 미대생에게 손놀림도 배웠는데 나중에 보니 다 편집됐다. 영화에 나오는 손은 조덕현 선생님 손이다(인물 사진을 데생으로 옮기는 조덕현의 그림은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모티브다). 말년의 윤희가 병으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장면은 머리에 망을 뒤집어쓰고 촬영한 후 CG처리했다. 삭발한 머리통이 진짜 예쁘게 나왔다.(웃음)"

-감독과 의견이 충돌한 대목은 없었나.

"감독님이 나를 믿고 예뻐한다는 걸 느꼈다. 감독이 배우를 예뻐하면 화면에 그 인물이 예쁘게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가장 예쁘게 나온 영화라 만족도가 높다. 하하. 물론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장면도 있다. 운동권 후배의 시위 주동을 만류하며 키스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오징어를 씹으라는 거다. 대사도 '여선생 여제자'처럼 하라고 하고. 깜짝 놀랐는데 나중에 화면 나온 걸 보니, 윤희의 쿨한 캐릭터가 잘 살았다."

-좋은 연기, 잘하는 연기란 뭘까.

"대사나 발음 같은 건 기본이고 인생을 잘 사는 게 답인 것 같다. 내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잘 살아가다 보면, 이게 쌓여서 다 좋은 연기로 나오는 것 같다. 삶의 깊이가 연기에 드러나는 거다. 똑같은 것도 상투적이고 무난하게 표현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것, 이것도 결국 삶의 태도와 연관된다."

글=양성희 기자<shyang@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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