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율 20% 치닫는 물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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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원론적으로 말하면 물가가 어느 정도 오르는 것은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고 근검·절약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순리라고 할 수 있다.
공산품이건 농수산물이건 서비스건 사람의 품이 들어가야 물건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인데 인건비가 1년에 10∼20%씩 몇년간을 올랐으니 비싸진 품을 들여 만든 물건이나 서비스값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불가피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지난 1·4분기의 물가상승률은 상궤를 벗어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개월동안 4.9%가 올랐다면 연율로는 19.6%의 상승속도다. 이 정도의 급격한 물가상승률은 두 차례의 석유파동때나 있었던 일로 지금 왜 이런 물가파동을 겪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가는 일이다.
물론 걸프사태로 지난 4·4분기의 국제원유가격이 크게 올랐고 농수산물이 홍수와 냉해를 입은데다 해걸이까지 겹쳐 작황이 나빴다는 특이한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농어업부문 성장률이 마이너스 4.1%를 기록한 것은 올 봄 딴 경기의 농수산물가격 상승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년말의 국제원유가 상승은 석유사업기금의 활용으로 상당부분 흡수되었고 더욱이 새해 들어서는 걸프전쟁이 진행중임에도 불구하고 기름값은 사태발생 이전 수준을 오히려 밑돌 정도로 안정되었다.
농수산물 가격상승은 절대물량이 모자라는 품목이 적지 않은 만큼 불가피하다고 할지 모르나 작금의 농수산물 가격 급상승 절대물량의 부족때문에서만 비롯된 때문인지는 의문이다. 연초 엄청난 물량이 수입된 바나나가 몇몇 중간상들의 농간으로 값이 뛰었던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농수산물 가격이 뛰자 수입으로 공급을 늘려 물가를 안정시키겠다고 하지만 바나나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유통구조상의 문제를 그대로 둔채 수입만 늘리는 것이 과연 물가안정에 얼마나 기여할지 궁금하다. 수입으로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골탕을 먹고 소비자들은 소비자들대로 비싼 농수산물을 사먹어야 할 지경들이 된다면 아예 수입을 하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올 봄의 물가상승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물가상승이 가져오는 산업경쟁력의 약화,노사분규의 유발등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제쳐놓더라도 서민들의 식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파·상추·명태값이 한꺼번에 42∼67%씩이나 올라서는 생계에 엄청난 압박을 주지 않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물가문제는 정부가 낙관하는 것처럼 그리 간단치가 않다. 무엇보다도 정책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이 큰 문제다. 농산물 가격안정을 위해 수입하겠다는 것은 유통상의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국내농업에 타격을 준다는 점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서비스요금·부동산가격의 문제도 구조적 장애에 부닥치고 있다.
주택·사회간접시설·환경·교육을 위한 투자확대 요구와 물가와의 충돌도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정부의 각별한 각오와 현명한 선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해지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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