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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불린 차지철(청와대비서실:1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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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각하 뜻”팔아 요직에 자기사람 기용/주요인사 뒷조사 비리·약점 훤히 파악/말기엔 제왕학·부인은 “왕비수업”소문
서슬퍼런 유신후반기에 박정희 대통령을 대리하다시피 청와대·당·내각·군을 휘어잡은 차지철은 단순한 경호실장이 아니었다. 실권면에서 본다면 부통령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부각하」란 말이 터무니없는 아첨성 발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정확한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사설 정보부대를 거느리며 중정을 앞질러 주요 정보를 장악했으며 실질적인 군통수권까지 행사했다. 이규광(전두환씨의 처삼촌)을 팀장으로 한 그의 사설정보팀은 주로 여권 핵심인사와 군요직자의 뒤를 캐는 일을 맡았다. 개인의 비리·약점을 훤히 내다보고 있는 그는 주로 인사권을 통해 세력을 확대해갔다. 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위를 능란하게 맞추면서 아래로는 뱃심좋게 파워를 행사했다.
실로 그의 권력행사는 무소불위였고 시류에 민감한 권력주변세력은 어쩌면 차지철이 박대통령을 이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었는지 모른다.
실제 78년 무렵부터는 차지철이 제왕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재혼한 그의 부인(현재 세딸과 함께 미국이민)에게 「왕비수업」을 시키고 있다는 소문이 권력핵심부간에 은밀히 나돌기도 했었다.
○야당 당수와 협상
차지철이 얼마나 셌는지를 말하는 수많은 일화 가운데 79년 2월 국회·당요직 개편때의 일을 빼놓을 수 없다. 78년 12월 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득표율에 이철승이 이끈 신민당에 패배했다. 충격을 받은 박대통령은 여권 수뇌부를 대폭 물갈이했다. 그해 12월말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을 김계원씨로 교체한데 이어 다음해 2월엔 백두진 국회의장·박준규 공화당 의장·태완선 유정회 의장으로 새팀을 구성했다.
이같은 라인업이 전적으로 차지철의 의도대로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백두진 의장만은 차실장이 「만든 것」이 확실하며 나머지 공화당 당직자와 유정회 회직자·국회간부 인선에는 차지철의 입김이 거의 절대적으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0대 유정회 의원을 지낸 K씨의 증언.
『당시 공화당 당직인선을 책임진 고위간부에게 직접들은 얘기예요. 이 사람이 당직인선을 구상하고 있을 단계에 차실장의 전화가 왔더래요. 「당면한 요직개편에 혹시 참고가 될까해서 각하의 의중을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각하를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말씀을 들어보니 대충 이런 사람들이 어울릴 것 같아 알려드립니다」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름을 줄줄 대길래 이 고위간부는 기껏 두 세사람쯤 천거하겠지 하고 들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란 말씀입니다. 개편대상 자리를 쫙다 부르더라는거죠. 그 고위간부인들 각하 의중이라고 하니 별 수 있나요. 받아 적은 당직자와 국회상임위원장을 합하니 20명이 넘었다고 해요.
이 당직자는 차실장이 불러준 명단을 자세히 뜯어 보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대로 수용하겠는데 차실장 직계인 서울출신 K의원이 당대변인이 되는 것은 도저히 못참겠더랍니다. 이 사람은 육영수 여사가 죽었을때 자기집에 빈소를 차려 곡을 하고는 온 사방에 「충성」소문을 냈었지요. 또 국회에서 의원들의 발언을 중계하듯 차실장에게 보고했던 사람이거든요. 당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심복처럼 부려야할 대변인에 그런 사람을 앉히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결국 고심끝에 K의원을 국회상임위원장으로 돌리고 오유방 의원을 대변인에 기용했지요. 그러나 차실장 사람이었던 S·L·J·M·K의원 등은 차실장 덕분에 자기 머리보다 큰 상임위원장을 차지했어요.』
차지철의 진면목은 그 다음에 나타났다. 그가 박대통령을 어떻게 활용하고 당과 국회를 어떻게 주물렀는지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예다.
K씨의 계속된 증언­.
『이 고위 간부가 차실장이 불러준 명단대로 인사안을 만들어 청와대에 들어갔어요. 박대통령에게 자기안인 것처럼 보고를 하는데 박대통령이 말을 가로막으며 「벌써 다 들었어. 요전에 차실장이 당신의 복안이라며 이야기하는데 썩 괜찮더군. 그런 식으로 한번 해보지 그래」라며 즉석에서 OK하더라는 거예요.
차실장이 당에는 각하의 의중을 팔고 각하에게는 당의 뜻이라며 둘러친거죠. 차실장은 이런 식의 정치행태를 상당히 고수인듯 즐겼지요.』
차실장은 박대통령의 후광을 철저히 이용했다. 그는 경복궁 연병장의 경호부대 사열식에 참석한 공화당·내각·군 고위인사들을 경호실 전용식당에 초대해 기를 죽였다.
큰 테이블이 6∼7개 들어갈만한 식당에 당정의 고위직이 앉아 있으면 이따금 그 자리에 박대통령이 직접 나타나기 때문이다. 차실장의 「식당정치」를 체험한 정치인들의 증언.
『백두진 국회의장·박준규 공화당 의장·태완선 유정회 의장과 저를 포함한 당직자들은 어느날 차실장으로부터 경호실 식당만찬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어요. 경호실장이 감히 국회의장·당의장을 부르다니 사실 무례한 행동이었죠.
○요직 전원을 천거
그런데 만찬에 갔더니 박대통령이 나타나는 거예요. 대통령이 경호실 식당까지 걸어 내려온 것을 보고 역시 차실장이 세긴 세구나 생각했죠.』(정재호 당시 유정회 대변인)
『어느날 청와대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차실장 부하가 와서 꼭 경호실 식당에 들렀다 가라고 해요. 가보니 차실장·김재규 정보부장·구자춘 내무·김치열 법무장관이 앉아 저녁을 먹고 있어요. 제가 큰 소리로 「차실장,이게 뭐요. 안보책임자들이 이렇게 모여 있다가 김신조라도 또 내려오면 어쩌려고 그래요」라고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했더니 차실장이 대뜸 이러더군요. 「우리나라의 국가보위는 곧 대통령 경호아닙니까. 그러니 경호관계자들이 이렇게 모여 이야기하는게 바로 국가안보업무입니다」라고요.』(박준규 당시 공화당의장)
『제가 건설부장관을 하고 있던 77년께인가 당간부·국무위원들이 경호부대 국기강하식에 초청받은 적이 있어요. 하기식이 끝나자 경호실 2층 식당에서 박대통령이 주재한 만찬이 있었죠. 헤드테이블엔 대통령과 차실장,당·내각고위직이 앉고 저는 끝자리에 육인수 당무위원등 4∼5명과 같이 앉았는데 경호실간부 한사람도 합석하더군요. 육위원이 「신장관,전장군 모르십니까」하며 소개를 시켰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전두환 작전차장보였어요. 아무리 경호실 식당이지만 장관과 준장이 합석하다니 속으로 좀 거북하게 느껴졌습니다. 차실장은 「각하를 보위하는데는 경호실 차장보가 장관보다 낫다」는 식으로 위세를 과시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신형식 전 공화당 사무총장)
차실장은 자신이 속으로 「썩었다」고 생각한 고위급 정치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공화당·유정회의 10대 초·재선의원 10여명으로 별동대를 만들어 관리하기도 했다. 변정일·김수·홍성우·윤국로·정동성·박찬종·이태섭·오유방·조홍래 의원 등이 그들이었다. 3선에 재담이 좋은 최재구 국회경과위원장은 당시 이들을 일어로 「고도모다치」(자공달­아이들」이란 뜻)라고 불렀다. 이 말은 곧 정치권에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차실장은 야당 당수를 상대로 굵직굵직한 정치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김영삼 총재에게는 「제명」이라는 초강수를 휘두르기도 했지만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며 타협과 공존을 모색했던 이철승 대표최고위원과는 깊숙한 얘기를 많이 했다.
차실장은 이대표와 만날 때는 야당당수라는 입장을 고려,극도의 보안조치를 취했다. 수행부관은 물론 평소에 자기차를 따라다니던 무장예비차도 붙지 못하게 했다.
이철승­차지철 회동에 대해 김용태 당시 공화당 원내총무는 『도대체 야당당수가 우리 당직자들을 제껴두고 경호실장을 왜 만납니까. 야당당수와 경호실장이 거래를 직접하니 우리야 핫바지저고리가 될 수 밖에요』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이철승씨는 이런 지적을 일축했다. 그는 차실장과의 접촉은 『참여하의 개혁이라는 정치소신에 따른 당연한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원칙만 따지자면 일국의 제1야당 당수가 대통령 경호실장과 만나 정국을 논한다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지요. 그러나 긴급조치로 꽁꽁 얼어붙은 동토정치판에서 야당이 원칙에만 매달린다고 얽힌 매듭이 풀리나요. 정치는 현실아닙니까. 야당이 집권세력을 거부한다면 몰라도 같이 살려면 대화를 해야지요. 그러자면 아무 힘없는 허깨비하고 이야기할 수는 없잖아요. 박대통령의 의중을 알고 그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실세를 잡아야지요.
지난해 민자당의 3당통합때도 김영삼씨가 민정당의 사무총장이나 원내총무를 상대했습니까. 실세라는 박철언 장관과 쏙닥쏙닥했던 것 아닙니까. 숨기고 몰래몰래 하느냐,까놓고 하느냐의 차이지 정치속성은 같아요.
○친위별동대 조직
내가 신민당 대표최고위원(76년 9월∼79년 5월) 할때는 박대통령 다음 실력자가 차실장이었어요. 사실 나도 처음에는 김재규 정보부장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박대통령과 같은 고향에다가 육사2기 동기니 누구보다도 박대통령과 가깝겠구나 믿었죠. 사람이 좀 우직해 정치를 다루는 솜씨가 정보부장으로선 수준미달이라고 느꼈지만 일본 사무라이같은 기질과 열의가 있는게 좋아보이더라구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사정이 달라지는 거예요. 김부장이 슬슬 차실장에게 뒤처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차실장의 힘이 확고부동해지더군요.
공화당 간부는 말할 것도 없고 여권의 고위직들이 차실장 눈치보는게 눈에 훤히 보이더라구요. 여당이 먼저 그래놓으니 우리 야당으로선 자연히 차실장에게 눈길이 가는거죠.』
이씨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차실장과의 비밀회동 사실을 인정했다. 그것은 야당당수로서 당연히 발휘해야할 정치력이었다고 주장한다.
『차실장이 먼저 만나자고 할때도 있었지만 중요한 문제가 생기면 내가 먼저 만나자고도 했죠. 주로 시내 요리집에서 만났습니다. 또 덜 중요한 사안은 평소 우리당 중진을 시켜 차실장에게 이야기하도록 했고 차실장을 만나면 나는 굵직한 것만 거론했어요. 내가 이야기하면 차실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를 하곤 했지요.
차실장에게 이야기해서 박대통령한테 먹혀들어간게 많아요.
77년 5월 내가 박대통령과 영수회담을 가질때 김대중씨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아 진주교도소에 갇혀 있었지요.
나는 김씨를 석방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영수회담을 앞두고 차실장을 만났어요. 차실장에게 「도대체 김대중이 뭐가 무서워서 그러느냐.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 어리석다. 몇 자(척)도 안되는 뱀을 막대기로 두들겨 왜 용을 만드느냐」고 슬쩍 둘러쳤죠. 이 말이 먹혀들었는지 박대통령을 만나 얘기를 꺼냈더니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더라구요. 결국 김씨는 77년 12월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것을 정권과의 부도덕한 거래로 보면 안돼요. 내나름대로 정치를 한겁니다. 물론 차실장이 세다고 해서 차실장만 상대하진 않았어요. 김재규 부장도 만났습니다. 나는 두사람을 상호 경쟁시켰습니다. 그 사람들 만나 내가 듣는 이야기도 고급정보지만 그 사람들이 야당당수에게서 듣는 이야기도 고급정보 아닙니까.
일부 공화당출신 인사들이 「야당당수가 경호실장을 만나 모든걸 해결하니 당대 당 정치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볼멘 소리를 한다는데 그 사람들 할말이 없어요. 차실장을 그토록 세게 만든게 누굽니까.』
이씨의 지적대로 당시 여권내의 그 누구도 감히 차실장의 독주를 막으려 나서질 못했다. 아니 그의 독주에 편승해 감투를 쓰거나 미운 털이 박히지 않도록 처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차실장의 성격이 하도 고약해 권총쏠까 겁나 말을 못했다』는 어느 구 공화당 당직자의 고백은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얘기다.
유신말기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냈던 신형식씨(66)는 『권부내에 진용이 메말랐던 시절』이라며 가슴아프게 회고하고 있다.
4선(전남 고흥)에 당대변인·사무총장뿐만 아니라 무임소장관·건설장관까지 역임해 박정희 정권 최대수혜자중의 1인인 그는 지금 간암과 힘겹게 싸우고 있다.
90㎏까지 나가던 건장한 체구가 65㎏으로 줄고 지난 1월부터 약물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그는 자신이 일부를 이루었던 차실장시대에 대해 「참회록」에 가까운 증언을 했다.
『10·26이 터지고 나니까 누구누구가 그럽디다. 「차지철이 때문에 나라망할뻔 했다」고….
허참,그게 말이 되나요. 유신말기에 나라가 그 모양으로 뒤틀려버린게 어디 차실장 한사람 탓인가요. 그때 권부내에서 무게깨나 잡았던 공화당 간부들중에 누구하나 나서서 박대통령한테 바른말한 사람이 있었나요. 나도 당 사무총장을 했으니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그 시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에요.』
신씨는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민을 했으되 진정한 용기가 없어 거센 시류에 묻혀버린게 부끄럽다는 것이에요』라며 이런 일화를 전했다.
『79년 9월말 뉴욕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유신정권을 비난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해 박대통령·차실장 등 정권핵심부가 「제명」이라는 칼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때 YS(김총재)도 정권타도를 외치고 있을때라 그대로 두면 제명이라는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어 있었죠. 그래서 나는 황낙주 신민당 총무와 은밀히 만났어요. 나야 사무총장이어서 원래 여야 총무접촉과는 상관없지만 현오봉 총무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내가 그일을 맡은 거죠.
황총무에게 김총재가 국회외무위에서 「회견기사는 내뜻이 아니다. 잘못 전달됐다는 식으로 해명하고 여야가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자는 타협안을 내놓았죠. 황총무도 파국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어서 둘이 진지하게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만 이게 신문에 1면톱으로 터지고 말았어요.
○“권총 쏠까봐 함구”
차실장이 가만히 있을리가 있나요. 그때 박대통령은 전방부대 시찰중이었는데 차실장이 가판신문을 헬기로 보냈지요. 박대통령이 노발대발해 「이 정도로는 안돼,제명해야돼」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에라,모르겠다」고 잠적해 동료의원 모친상 상가에 가있는데 차실장이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했어요.
차실장은 「신총장,왜 쓸데없는 일을 해 가지고 각하가 화내시게 합니까」라고 매섭게 쏘아 붙이더군요.
그때 박준규 당의장이 강경론자인 것처럼 비쳐졌지만 속마음은 나와 같아 어떻게 해서든지 제명만은 막아보려고 고민 많이 했어요. 그러나 고민만 하면 뭐합니까. 박의장이나 나나 박대통령한테 찾아가 간언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김진기자>
◎차씨 첫번째 부인의 반론
본지 3월1일자(일부지방 3월2일자) 「청와대 비서실」 15회중 차지철의 첫 결혼에 대한 Q씨의 증언에 관해 차씨의 첫번째 부인이 대리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해 왔다.
『본인과 차씨와의 결혼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K씨의 소개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초기 결혼생활은 매우 순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성격상 차이로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차씨는 우락부락하고 난폭한 성격이었으며 저는 이에 적응하려고 최대한 노력했으나 결국 화합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집식구와도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결혼한지 29일만에 결혼생활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차씨의 측근이라는 Q씨의 증언은 자신이 모셨던 차씨의 입장만을 고려한 일방적 주장이자 허위사실입니다. 본인은 차씨와 한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이라 그에게 누가되는 이야기를 하고싶지 않습니다만 문제가 거론됐기에 이렇게 밝히며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양 보도한 중앙일보에 유감을 표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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