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항공기 공짜표 받아 퇴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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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지난달 하순부터 홍콩을 뜨겁게 달궜던 '항공기 티켓 스캔들'이 인권기구 수장(首長)의 사퇴로 일단락됐다.

둥젠화(董建華)행정수반이 임명했던 왕젠추(王見秋.67)평등기회위원회 주석이 3개월 만에 사표를 던진 것이다.

王주석은 1961년 영국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검사.법관 생활을 하다가 대법관에 버금가는 자리까지 역임한 법조계의 거물. 董수반과는 대학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2년 전 은퇴했으나 홍콩 정부의 위촉으로 지난 8월 평등기회위원회를 맡았다.

스캔들의 발단은 변호사인 둘째딸이 홍콩 부호로부터 넉장의 항공기 티켓을 받은 것이었다. 이어 王주석이 법관 퇴직 이후 기업.법인의 고문으로 취직해 일정 기간 재취업을 금지하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의혹이 드러났다. 자신을 비판했던 부하직원을 부당하게 퇴직시킨 혐의까지 제기됐다.

그가 법관 시절 받았던 월급은 20만홍콩달러(약 3천만원). 홍콩의 지식층들은 "공직자가 월급을 많이 받는 만큼 청렴의 의무는 더 커지는 것 아니냐"며 王주석의 사임을 당연시했다.

경제가 어려워 일자리를 잃거나 월급이 30~40%씩 깎인 사람이 많은데 엄청난 퇴직금을 받은 공직자가 항공기 티켓까지 공짜로 받으려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야당과 30여개 민간단체가 그의 퇴진운동을 벌였다.

王주석은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언론과 정치권의 부당한 공격을 감당하지 못해 물러난다"며 "이것은 정치 투쟁이자 정치 박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시민은 20%선에 불과하다.

홍콩에선 지난 7월 차량 등록 세금을 올린다는 정보를 미리 알고 고급 승용차를 구입했던 경제총수 량진쑹(梁錦松)전 재정사장이 불명예 퇴진한 바 있다.

한평생 쓸 재산을 가진 사람이, 공직을 이용해 비록 작지만 탐욕을 부렸다는 것에 대한 질타였던 것이다.

이런 홍콩인들이 몇백억원의 정치자금을 받고도 끄덕없는 한국 정치인들을 보면 뭐라고 할까. 딩왕(丁望)전 명보 총편집인은 "한국의 정치상황이 홍콩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에는 입을 다물었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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