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냉탕·온탕"의 순환보직이 원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우리나라 외교 인력은 줄잡아 1천6백여 명이며 이들 중 6백40명 가량이 세계1백40개국 의 재외 공관에 근무하고 있다.
대사 1백 명, 공사 25명, 총영사 35명 가량이다.
해마다 3월이면 이들 가운데 4분의 1정도가 근무지를 옮긴다.
해외근무 3년을 마친 사람들이 본부로 돌아오거나 본부에 근무하던 사람이 해외로 파견되는 것이다.
외무부는 올해 초부터 부분적으로 인사이동을 단행, 행정적으로는 지난달말 상반기 인사를 모두 매듭지었다.
전통적으로 외무부의 인사는「온탕」「냉탕」이라는 순환보직 원칙에서 이루어진다. 아프리카처럼 풍토병이 많고 중남미처럼 정 정이 불안한 곳은「온탕」이며 유럽·미국과 같은 경우는「냉탕」이 된다.
차가운 것보다 뜨거운 것이 낫다는 이유로 냉·온탕의 의미를 뒤바꿔 쓸 수도 있으나 외무부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 같은 순환 근무제에 따라 한번「냉탕」에 들어간 사람은 다음 번에는「온탕」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 같은 원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인사 철이 되면 학연·혈연·지연 등 이른바 끈이 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동원해 냉탕에서 다시 냉탕으로 가려 하고 온탕에 있던 사람은 냉탕으로 옮겨가려고 안간힘을 쓴다.
근무여건이 좋다는 이유도 있지만 냉탕의 경험이 많을수록 출세의 기반도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외교의 중심이 미·일·유럽인데 이들 나라를 모르고서야 외무부내에서 고위직으로의 승진을 꿈꿀 수 없는 노릇이다.
현재 본부에 근무하는 국장급 이상의 간부 치고 미·일등에서의 근무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근무지역간의 이 같은 편차는 외교관들을 항상 불안하게 하고 끊임없는 인사잡음을 낳게 한다.
첫 발령 지를 워싱턴으로 받은 사람과 아프리카에서 3년을 보낸 사람은 영어 실력에서 차이가 나고 이 같은 영어실력이 다음 번 인사에 그대로 반영되는 악순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과 관련, 외무부에서는「전국구」 라는 은어가 있다. 일류 대학을 나오고 집안배경도 좋아 처음부터 좋은 지역으로만 돌아다닌 일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굳이 뛰지 않아도 국회의원이 되는 전국구처럼 애쓰지 않아도 A급 근무지로 갈 수 있고 승진도 수월하다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인지 89년 가을 젊은 외교관 3명이 통일원에서 일하고 싶다고 희망해 외무부에 충격을 주었다.
여러 가지 개인사정이 있겠지만「별 볼일 없는」부처로 자원을 할만큼 외무부내에서의 승진에 희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무엇인가 외무부의 인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런 외무부의 인사를 둘러싸고 최근 외교관들 사이에 새로운 풍조가 생기고 있다. 이른바 지역중심보다 공관장이 누구냐에 따라 냉·온탕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비록 아프리카 오지고 영어권 나라가 아니라 하더라도 공관장이 장차 외무부내에서 장관이라도 할 만한 재목이면 어디든 가겠다는 추세다.
전직원이 5∼6명밖에 안 되는「쓸쓸한」공관 근무에서 윗사람을 철저히 모셔 다음을 기약하자는 취지에서다.
이 같은 출세지향형과 달리 또 다른 의미에서 공관장 중심으로 부임지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는 외교관들도 있다는 게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국판 신 인류(신세대)라고 해도 좋을 이런 사람들은 출세에는 관심 없고 평안한 해외 근무만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관장의 성품이 까다롭고 수발해야 할 손님들이 많이 오지 않는「조용한 곳」을 희망하는 이 모든 현상은 외국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특권일 수 없는 사회 풍조의 변화 탓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외무부의 인사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이유에서인지 외무부는 다른 부처와 달리 국장급 이상의 본부 간부를 당연 직 위원으로 하고 차관이 위원장이 되는 인사위원회를 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위원회는 가급적 공정하게 하려 애쓴다지만 실제로 그럴 것인가에 대한 외교관들의 회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