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붉은 방』을 보고…김미도 <연극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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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텔리비전 앞에서 턱을 괴고 엎드려 프로야구를 보면서 나는 바로 그 똑같은 시간 이 당 어딘가에 그렇듯 괴이하고 기묘한 붉은 방이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예 상상조차 못하고 지내왔던 것이다.』
연극 『붉은 방』(3월3일까지 동숭동 소극장)은 전쟁과분단이 파생시긴 정치적 폭력의 한 극단을 확대 조명함으로써 이에 무관심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의식적 부끄러움을 일깨운다. 88년이상문학상 수상작이며 임철우의 원작 소설을 이창기가 각색하고 황남진이 연출한 이 작품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무고한 시민들을 조직적인 간첩단으로 둔갑시키곤 하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적나라하게 들춰보이고 있다.
평범한 교사 오기섭(박용수 역)은 어느날 출근길에까닭도 모르고 기관원들에의해 연행되어 지하 밀실인붉은 방에서 수사관 최달식(이호성 역)으로부터 잔인하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간첩으로 조작된다.
무대는 1층을 극장식 카바레, 고문실, 달식의 사무실로 분할했고 2층은 기섭과달식의 집 거실로 나누어 5층 구조로 설계했다. 그밖에도 1층 무대 후면이 경우에따라 회상과 상상의 공간으로 대치되기도 한다. 카바레 에서는 음담패설로 가득찬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선정적인 쇼가 진행되면서 고문.실의 폭행, 비명, 공포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이유없이 당하는 오기섭의 억올함 만큼이나고문자인 최달식의 명분이 망당하게 부각되어 있다. 교회 집사이기도한 달식은 전쟁때 가족이 공산당에 의해 무참히 집단 학살당한 개인적 경험때문에 광신적으로반공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있는 인물. 그의 어머니는과거의 피해망상으로 자신의 오물을 떡 주무르듯 하고 이에 지친 아내는 어머니를 기도원으로 보내자고 장강한다.
그러나 이 연극의 약점은바로 오기섭에 비해 최달식에게 지나친 비중이 주어진데 있다. 달식의 가족사와가정문제가 너무 강조되는바람에 그의 야수적 고문 헹태를 다소 합리화시키는 혐의가 있기 때문이다. 균형적인 시점을 위해서는 달식이그러한 비인간적 폭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뒷방침해주는 체제의 비도덕성이 보다 강렬하게 가시화되였어야했다.
원작에도 없는 카바레 무대의 설정은 여전히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화려한사회의 부패한 이면이 원래의 의도만큼 본 줄거리와 잘 맞물리지 않았고, 무희들의자극적인 춤과 호스티스의과도한 노출도 별 필요성이없이 삽입되었다. 무엇보다도 붉은 색으로 단장된 덩치큰 카바레 무대에 비해 오히려 협소하고 컴컴한 고문실은 붉은 방의 이미지를 거의주지 못했다.
이러한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새해들어 처음으로 주목할 만한 창작극의성과로, 특히 한동안 저조했던 정치극의 면모를 일신하고 원작의 깊이에 힘입어 성숙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었다. 입체적 다층 구조의무대를 통한 빠른 장면전환과 동시 진행, 오버 랩 수법등은 상황의 긴박함을 더해주면서 주인공들의 심리상태를 간파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각목 세례와 가혹한 물고문을 견디며 열연한 박용수의 연기도 일품이었지만 희극적 제스처 속에서 가족과민족의 비극적 아픔을 끌어내는 이호성의 노련한 연기력이 단연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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