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서민에 희망 주는 파리 주택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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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프랑스의 파리시가 12일 주택 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술하는 중대 결단을 내렸다. 영세민들이 사는 노후주택을 우선적으로 매입해 리모델링 작업을 거친 뒤 이를 영세민들에게 싼 임대료로 재분양하고, 여기에 드는 예산을 대폭 늘린다는 것이 그 골자다. 이는 비싼 임대료와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눈물을 머금고 보금자리를 떠나는 서민들을 계속 파리에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취한 조치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파리 시내 부동산 소유주에 대한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파리에는 부동산 투자회사들이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가 많다. 1990년대 말 이후 저금리로 마땅한 투자 대상을 찾지 못하던 투자회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사들인 것들이다. 이 투자회사들은 부동산 시장이 최근 10여 년간 상승세를 타면서 기대 수익률을 훌쩍 넘기게 되자 몇 년 전부터 아파트를 팔려고 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이들 투자회사 소유의 아파트 세입자 중 임대기간이 만료된 사람들은 살던 집을 살 능력이 없는 경우 집을 비워주고 본의 아니게 파리 외곽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투자회사에 의해 팔려나간 아파트가 3만 채가 넘는다. 임대해 살던 아파트를 직접 사들인 사람이 전체의 35%라고 하니, 나머지 2만여 가구는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파리시 의회 녹색당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은 10만여 채의 노후주택을 파리시가 향후 3년 동안 매년 9억 유로를 들여 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당 의원들도 녹색당 의원들의 주장에 동조했다.

그러자 처음에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던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도 결국 중재안을 수용해 영세민들을 위한 노후주택 리모델링 사업을 가속화하기로 결정했다. 예산 부족으로 모든 서민이 당장에 확실한 보금자리로 옮길 수는 없지만, 최소한 조만간 그런 보금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은 품을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없는 사람'들을 위해 어려운 가운데서도 정책의 우선 순위를 과감히 바꾸는 파리시의 행정을 보면서 문득 집값과 전셋값이 치솟고 있는 한국이 떠올랐다.

박경덕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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