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기자단 웃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반기문(사진) 차기 유엔 사무총장이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각국 외교 사절과 유엔 출입기자들을 매료시켰다. 8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 출입기자단 송년 만찬에서였다. 선거운동 때는 딱딱하다는 평을 듣던 그였다. 그런 반 총장이 뛰어난 재치와 유머 감각으로 370여 명의 청중을 사로잡았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이어 연단에 오른 반 총장은 마이크를 잡자마자 농담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는 "클린턴 뒤에 연설하는 건 프랭크 시내트라 뒤에 노래하는 셈"이라고 비유, 웃음을 자아냈다.

반 장관은 코피 아난 현 사무총장을 향해서도 기분 좋은 우스개를 했다. 그는 "아난 총장이 남긴 족적은 너무 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치켜세웠다. 그러곤 "잘 다듬어진 수염을 길러야 할지, 더운 나라에 갈 때 사파리 점퍼를 입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내가 내린 답은 아난의 코디네이터 팀을 쓰는 것"이라고 해 좌중을 웃겼다.

자신의 별명도 유머 소재로 활용했다. 반 총장은 자신을 "한국에서는 '미끈미끈한 장어', 미국에서는 '테플론 외교관'이란 별명으로 통한다"고 소개했다. 테플론은 듀폰사가 개발한 고분자 화합물로 프라이팬 표면에 코팅하면 음식 등이 잘 달라붙지 않는다. 결국 언제나 요리조리 빠져나간다는 뜻인 셈이다. 그는 이어 "이 별명들은 언제든 비밀요원처럼 당신들을 현혹시킬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그의 유머는 연설 말미에 절정에 달했다. 반 차기 총장은 크리스마스 캐럴인 '산타클로스 이즈 커밍 투 타운(Santa Claus is coming to town.산타 할아버지가 마을로 오시네)'을 '반기문 이즈 커밍 투 타운(Ban Ki Moon is coming to town.반기문 총장이 마을로 오시네)'으로 개사해 직접 노래를 불렀다. 서툰 노래 솜씨였지만 그는 큰 박수와 환호를 받으며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와 관련, 미국 뉴욕 타임스(NYT)는 9일 인물란 한 면에 걸쳐 반 총장을 다뤘다. NYT는 그의 성장 과정과 숨겨진 일화 등을 소개하며 반 총장의 겸손함과 호감 주는 태도는 계산된 행동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NYT는 "그간의 스타일로 볼 때 그는 장군보다 비서 같은 총장이 될 거라는 예상이 많다"고 평가하면서도 "그러나 10년 전 똑같은 평가를 들었던 아난 총장도 장군으로 임기를 마쳤다"고 설명했다. NYT는 또 "겸손함을 단호함과 열정 부족으로 해석해선 곤란하다"는 반 총장의 발언도 소개했다.

반 차기 총장은 11일 워싱턴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을 만난 뒤 뉴욕으로 돌아와 14일 유엔 총회에서 취임 선서를 할 예정이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