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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안끝났다” 출국 거부/현대근로자 이라크 탈출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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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눈물호소… 검문소 통과/공습 첫날 잠옷 차림으로 대피/“인질될지도…” 무조건 탈출결심
『사전에 얻어놓은 출국비자의 유효기간(23일)을 다 넘기도록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라크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국적군의 공습은 매일 계속되고 참으로 불안하고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걸프전 발발이후까지 이라크에 머무르다 아흐레만에 이란으로의 탈출을 시도,극적으로 무사귀국에 성공한 현대건설 이라크 사업본부 직원·근로자 9명은 전장 탈출에서 쌓인 피로와 공포로 긴장된 모습이었다.
다음은 그들의 이라크 탈출기.
◇전쟁발발=김종훈 이사를 비롯한 귀국 근로자·직원들이 전쟁을 직감한 것은 17일 오전 2시쯤.
바그다드시 도심에서 30㎞ 가량 떨어진 이폭 사업본부와 키루크·베이지 등 각 공사현장에서 일제히 대공포화 소리와 함께 하늘이 붉은 섬광으로 번쩍이는 광경이 목격됐다.
혹시 훈련상황일지 모른다는 한가닥 기대를 안고 미리 파놓은 방공호에 대피한 일행은 방송을 통해 전쟁발발을 확인했다. 이 때가 오전 3시30분쯤.
방해전파로 일체의 무선방송이 두절된 가운데 가까스로 연결된 BBC방송을 통해서였다.
『2∼3m 가량 땅을 판뒤 저수조 2개를 연결해 만든 방공호에 현지 근로자와 직원 40여명이 잠옷차림등으로 대피했습니다. 날이 밝으면서 비상식량과 모포 등을 챙겼습니다.』
◇대피=이들은 공습이 잠잠해진 이날 오후 버스 2대와 서버반(봉고버스) 1대,승용차 1대 등 차량 4대를 이용해 현장별로 사업본부에서 북동쪽으로 65㎞,이란국경에서 1백20㎞ 가량 떨어진 바쿠바시의 현지인 농장으로 피난했다.
『농장지대인 바쿠바시는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낮을 이용해 회사재산관리와 식량수송 등을 위해 바그다드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이동도중 놀라웠던 것은 다국적군의 공습이 정확하게 관공서와 군시설들만을 골라 폭파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탈출=19일 이들은 이란으로의 탈출을 결정했다. 그러나 비자의 출국국가가 이란이 아닌 요르단으로 표시된 직원과 근로자가 대부분인데다 국경검문소에서는 까다로운 서류를 요구하며 통과를 거절했다.
이폭사업본부의 일부 직원·근로자들은 이라크의 공사발주처에서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출국동의서를 발급해주지 않은데다 개전후 전기·수도가 끊기는등 일상업무가 마비돼 서류보완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들은 피란행렬이 줄을 잇는 가운데 21일 재차 탈출을 시도했으나 「출국서류완비」를 내세우는 국경검문소의 요구로 또다시 좌절됐다.
『한국대사관은 철수한 상태였고 이라크 이민국에 현지인을 대동,도움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기다리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언론사와 각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려고도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국경돌파=22일부터 이들에게는 전쟁인질이 돼가고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고 몇차례의 회의를 거쳐 서류준비보다는 무조건 월경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공습은 더욱 가속됐고 지상전과 화학전 발발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을 일단 넘기만 하면 전쟁난민으로 보호받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전원철수를 위해 베이지·키루크 현장에 보낸 직원들과의 연락이 끊겨 우선 한국인 9명과 현지근로자 28명이 1진이 되어 국경돌파를 시도했습니다.』
가까스로 만료된 비자기한을 단 하루 연장한 24일을 D데이로 잡은 이들이 국경에 도착한 것은 24일 오후 5시.
그러나 중무장한 국경검문소 경비병은 한사코 외무부의 「특별허가서류」를 요구했다.
『잔류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옷자락을 붙들고 통곡도 했고 서류를 집어던지며 윽박질러보기도 했고….』
◇이란도착=천신만고끝에 이란의 국경도시 코스라비에 도착한 것은 25일 0시.
『살았다는 생각보다 남겨둔 동료들 걱정으로 착잡했습니다.』 이들은 이란측의 호의로 코스라비를 거쳐 무사히 바크다란으로 이동했으며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은뒤 26일 오후 9시 테헤란에 도착했다.
서울행 연결편인 이란항공에 몸을 실은 것이 30일 오후 7시15분쯤. 그리던 가족과 고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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