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추위 녹인 용감한 시민(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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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도둑이야」라고 외치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가게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20대 청년이 여자용 가방을 낚아채고 가게앞을 스쳐 후다닥 달아났고,남루한 옷차림의 40대 부인이 헐레벌떡 뒤를 쫓고 있었다. 부인과 함께 청년을 쫓아 허리춤을 붙잡았다. 발길과 주먹으로 치고 받으며 10여분간 난투극을 벌였다.
26일 새벽 서울 이태원에서 빌딩청소원 이모씨(44·여)의 손가방을 날치기해 달아나던 범인 한상옥씨(29·무직)를 붙잡은 「용감한 시민」 조일환씨(29·상업)의 날치기범 체포격투기다.
조씨가 범인의 손을 뒤로 비틀고 파출소로 들어가자 당직순경은 『또 잡으셨군요』라며 조씨를 반겼다.
조씨가 강·절도범을 붙잡아 파출소로 넘긴 것이 벌써 이번으로 일곱번째나 됐다.
조씨는 이날 새벽까지 가게에서 일을 하다 피로에 지쳐 깜박 졸던중 이씨의 비명소리를 듣고 충동적으로 범인을 뒤쫓았다.
범인이 날치기한 손가방에 들었던 현금은 겨우 3만원.
그러나 빌딩청소원으로 생계를 꾸려온 이씨는 『한달 생활비가 든 손가방을 날치기 당해 막막한 기분이었다』며 손가방을 돌려받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친구들은 흉악범을 뒤쫓다가 도리어 변을 당할는지 모른다며 못본척,못들은 척하라고 하지요. 그러나 못본척할 경우 범죄는 더욱더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못본척할 수가 없어요.』
범인과의 격투로 피가맺힌 입술을 매만지며 『남자로서 할일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하는 조씨.
『사람이 죽어가도 가만히 서서 구경만하는 세상아닙니까. 그러나 조씨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사회의 양심은 아직 살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씨를 「살아있는 양심」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당직경찰관.
영하의 추위로 거리는 꽁꽁 얼어붙었으나 파출소안은 훈훈한 온기가 배있는 듯했다.<양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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