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와 패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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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현대전엔 승자도,패자도 없다. 우선 무기체제만 보아도 그렇다. 만일 핵무기를 비롯해 첨단과학 무기들이 동원되는 전쟁을 치르고 나면 그 자리엔 승자의 깃발도,패자의 눈물도 없을 것이다. 대량 살상에 의한 비명과 침묵만이 교차될 뿐이다.
첨단무기 아닌 재래식 무기에 의한 전쟁이 벌어져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비록 대량살육은 없을지 몰라도 승자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하는 화려한 승리는 얼른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베트남전쟁에서 그것을 보았다. 미국은 그때 어느모로 보나 이긴 쪽은 아니었다. 승자는 월맹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실망보다는 교훈을 새겼다. 승자인 월맹사람들은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깃발을 흔들며 기뻐했지만 그 순간부터 다른 한쪽에선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로 밀려나는 「보트 피플」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지 10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베트남엔 평화도,풍요도 없다. 승자의 자만마저 없다. 그저 가난과 공포와 한숨뿐이다. 아직도 보트 피플이 끊이지 않는 현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예외가 아니다. 소련은 분명 그 나라를 점령한 승자의 나라인데 오히려 그로 인해 소련은 국제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고립을 경험해야 했는가. 국가적으로 입은 경제적,정치적 손실은 더 말할 것 없다. 결국 소련은 체면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83년 영국의 포클랜드전쟁은 2개월만에 끝났다. 이 전쟁은 아르헨티나에 빼앗겼던 영국령을 다시 찾는 전쟁이었다. 다른 전쟁과 성격이 달랐다. 더구나 영국의 상대가 너무 허약해 무슨 평가를 내릴만한 전쟁도 아니었다.
지금 전쟁이 벌어진 페르시아만에서도 국면은 비슷하다. 미국을 선두로 한 다국적군이 패배하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승자가 얻을 것이 무엇일지는 두고 봐야한다.
아랍 세계에서 미국은 잠재적인 적이 되는 차가운 눈초리를 견디어야 할 것이며 이라크도 후세인이 죽지않는다면 그는 미국에 항거한 영웅으로 여전히 남을 것이다. 실로 기묘한 상황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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