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재혼' 딜레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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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2004년 7월 세 살 된 딸과 함께 남한으로 탈출한 북한동포 A씨(34)는 올 봄 서울가정법원에 북한에 있는 남편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냈다. 남편은 A씨와 함께 중국으로 탈북했으나 중국 공안당국에 붙잡혀 북으로 송환됐다.

남한에 온 뒤 경제적.정신적 어려움을 겪었던 A씨는 지난해 B씨(38)와 만나 재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결혼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새 호적을 만들면서 북한에서 혼인했던 사실을 밝혀 호적에 기혼자로 돼 있기 때문이다.

A씨처럼 남한에서 새 가정을 꾸리려는 탈북자가 북한의 배우자를 상대로 낸 이혼소송이 200여 건이 넘는다. 하지만 한국의 현행 법체계로는 이런 경우 이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C씨는 최근 탈북에 성공해 남한으로 왔다. 4년여 전에 먼저 탈북한 아내를 찾아서다. 아내는 남한에서 만난 남성과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한데 아내는 남한에서 새 호적을 받으면서 남편 C씨를 호주로 올려놓았다. 한국 정부가 탈북자에게 지원하는 주택(주로 임대)은 이미 아내가 받았다. 이 때문에 C씨는 아내도 못 찾고, 지원도 받지 못했다.

탈북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이처럼 '복잡한 가족관계'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적용할 법 규정이 없어 앞으로도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전망이다.

◆ 소송은 늘어나는데=지금까지 북한에 있는 배우자를 상대로 제기된 이혼소송 229건 중 선고가 내려진 것은 1건이다. 법원은 2004년 오모(35)씨가 제기한 이혼소송에 대해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지 3년이 넘었고▶남북 간 왕래가 쉽지 않아 북한의 남편과 혼인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이 가혹하다는 이유로 이혼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판결에 대해 찬반 논쟁이 붙으면서 더 이상 이혼을 인정하는 판결은 없었다.

◆ 쟁점은 많고=법원의 입장에선 북한에 있는 배우자를 피고로 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탈북자의 진술밖에 없어 북한의 배우자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배우자가 북한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혼 사유가 되느냐도 쟁점이다. 현행법은 '악의적인 유기나 부정행위 등 배우자가 혼인생활에 중대한 문제를 일으켰을 때' 이혼이 성립한다. 따라서 배우자가 북한에 자발적으로 있는 게 아닌 한 가족을 악의적으로 유기했다고 보기 힘들고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또 법원이 이혼소송 서류를 북한의 배우자에게 전달할 수 없는 것도 문제다. 피고가 이혼소송에 대한 통지를 받고 소송 경과에 따른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고 대응방법을 강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송서류가 정확히 전달되지 못할 경우 법원은 게시판에 공시송달을 한다. 그러나 탈북자의 이혼소송은 공시송달 절차를 따르는 게 옳은지도 논란거리다. 현행법상 당사자의 주소.근무장소 등을 알 수 없는 경우 공시송달을 하지만 부부 중 한쪽이 탈북하고 배우자는 북한에 있는 경우가 주소를 알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하느냐는 것이다.

◆ 대책은 어려워=국회 법사위에는 김학원.이화영 의원이 발의한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다. 탈북자의 이혼을 쉽게 해주려는 법이다.

고려대 법대 신영호 교수는 "법이 제정되기 전이라도 법원이 2004년 내려진 판결 등과 같이 재판을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위원은 "법원이 판결을 보류하는 것은 탈북주민의 가족생활 보장 및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중론도 있다. 서울여대 사회사업학과 박윤숙 초빙교수는 "특례법을 만들어 이혼을 허용하면 남한으로 뒤늦게 입국한 북한의 배우자가 한국 정부에 자신의 권리와 인권이 침해됐다며 소송을 내거나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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