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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시인 이근배|전봉준의 「동학혁명」이 타오르는 정읍「배들벌」「황토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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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물이 흐르지 못하여 마침내 불길로 솟은 땅이 있다. 눈발 섞은 겨울바람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치를 안으로 담고 잉잉거리는 들판이 있다. 그렇다. 섣달 그믐의 저 배들 벌에 나가 보라. 와아 와아 그날, 백성들의 함성인 듯 들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고 이 나라 역사에 핏발을 세우는 혁명의 깃발이듯 바람소리가 하늘을 때리고 있다.

<천둥 같은 민중의 힘>
혁명이 있었다. 서럽고 서러운 백성들이 견디다 못해 낫과 팽이를 무기로 들고 일어선 혁명이 있었다. 몇몇 사람의 권세욕에 사로잡혀 저질러진 반역이 아니었다. 비로소 이 땅에 백성이 하늘임을 알리는 천둥 같은 민중의 힘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동학혁명. 이 나라 역사에 최초로 일어났던 민중혁명이 혁명이란 이름을 얻기까지만 해도 70년의 세월이 걸렸었다. 어려서 할머니에게 녹두장군 전봉준의 신화와 동학군의 이야기를 삼국지의 무용담처럼 아득히 듣고 자랐으나 이제 그 터전에 와서 선연한 핏자국을 더듬게된 것이다.
정읍 군청이 있는 정주시에서 북쪽으로 십리 남짓 가면 황토재(황토현·덕천면 하학리) 가 나오고 거기 나즈막한 산언덕에「제포 구민 보국안민」의 혁명구호를 높이 새긴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서있다. 여기가 맨주먹으로 일어선 농민들의 군대인 동학군이 관군과 크게 싸워 대승을 거둔 혁명의 격전지(국가지정 문화재 295호)다.
이 탑은 1963년 10월3일에 세워졌는데 탑을 세운 것보다는「혁명」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있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그후 혁명 90주년을 맞아서야 등 너머에「황토현 기념관」을 지어 동학혁명의 기록화·사진·법기·의상·도서·녹두장군의 초상·글씨 등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황토재에서 다시 북쪽으로 시오리쯤 가면 동학군이 최초로 집결했다는 말목 장터가 나오고 거기서 북쪽으로 넓게 터진 전라도 고부 땅 배들 벌(정읍군 이평면)에 혁명의 성난 물살이 터진 만석보가 나온다.
만경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동진강과 내장산에서 물줄기가 내려 정읍을 휘감고 온 정읍천이 만나는 자리,「만우보견지비」가 그날 이 고을 농사꾼들의 설움과 노여움을 끓이며 서있다.

<향교장의의 아들>
전봉준은 바로 이곳 고부 땅에서 고부군 향교의 장의로 있는 전창혁의 아들로 1855년에 태어난다. 비록 시골 향교의 장의일망정 글을 숭상하는 아버지 밑에서 남다른 재능으로 시서에 몰두했으리라는 것은 그가 열 세살 때 쓴「백구시」에서 읽을 수 있다.
저대로 모래 발에 흥겹게 놀며 눈같이 흰 깃털 가녀린 다리로 홀로 가을을 딛고 섰구나
쓸쓸히 찬비 내리는 날은 꿈속에 젖어들기도 하고 고기잡이 돌아간 뒤에
언덕에 날아올라도 본다 물과 돌이 지천이어도 낯설지 않은데
몇 풍상이나 겪었다고 벌써 흰머리가 된 것이냐 비록 번거로이 먹이를 쪼으나 분수를 넘지는 않겠거니
세상의 물고기들이여 아예 근심일랑 하지 말게나.(자재사경득의유 설상유각독청추 소소한우내시몽 왕왕어인거후구 허다수석비생면 열기풍상기백두 음탁수번무과분 강호어족막심수)
이 시는 열 세살 소년이 썼다 기에는 믿겨 지지 않을 만큼 묘사력이 뛰어나고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언뜻 보면 조선조의 선비들이 즐겨 짓던 한가로운 읊조림인 듯 싶지만 뜯어보면 심상치 않은 의미를 담고있다.
한낱 해오라기도 남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을 만큼 쪼아먹는 분수를 지키는데 고부 군수 조병갑은 날짐승만도 못하여 배들 벌 농사꾼들이 피땀 흘려 지은 곡식을 물 값(보세)이라는 명목으로 사정없이 뺏고 있었다.
강물이 여기저기 흘러들어 오죽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었으면 이름이 만석이랴. 그럼에도 백성들의 쌀독은 거미줄이 치고 조병갑이 거둔 쌀은 산처럼 쌓여 갔다. 힘없고 몽매한 농사꾼들이라도 어찌 피가 끓지 않겠으며 원성이 쏟아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진정을 하고 수탈을 낮출 것을 간청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는 모진 매와 징역살이만이 기다릴 뿐이었다.
녹두장군의 아버지 전창혁도 군수자리를 잠시 떠난 조병갑의 기생출신 서모의 부의를 과중하게 배정하자 거부하는데 앞장섰다고 끌려가서 모진 매를 맞고 죽어 나오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것이 1893년 정월쯤이라고 하는 것은 전봉준이 혁명을 일으키던 1894년1월에 상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에서 유추하고 있다.
마침내 백성들은 일어섰다. 전봉준을 필두로 송두호·송인호·정종혁·김도삼 등 20여명은 뜻을 같이하고 「사발통문」을 돌리기 시작했다.『민중들은 처처에 모여 말하기를「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남아있겠나!」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는 글귀에서 당시의 민심이 어떠했으며 원성이 어떠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
1893년 (음)11월에 작성한 이 사발통문은 일,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일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일 전주 영을 함락시키고 경사로 직행할 것 등을 적고 있어 혁명의 불길은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1894년2월15일 새벽 전봉준은 1천여명의 농민 군을 말목 장터에 집결시켜 고부읍으로 진격, 고부읍을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린다.
5월11일에 황토재에서 관군과 보부상군 2천 병력을 섬멸하고 이어서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 20일 뒤엔 전주성에 무혈입성 하여 전장을 전국토로 확산시킨다.
녹두장군의 신화와 동학혁명의 깃발은 성난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렇게 하늘 높이 솟구치고 있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불평등한 제도와 석은 정치를 뒤엎고 백성들이 함께 잘사는 나라를 찾겠다고 일어선 전봉준. 키가 작고 몸집이 단단하다고 해서 녹두장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겠는데 싸움터에 나가지 못하는 부녀자들과 힘없는 백성들은 이 파랑새 노래로 그들의 심사를 쏟았으며 이 노래로 동학혁명의 승리를 기원했던 것이다.
도피 중 밀고로 잡혀 파랑새는「청병」을 가리키고 청포장수는 동학군의 옷소매에 파란 끝동을 달았다고 해서 동학군을 일컫는 것으로 해석할 때 녹두 꽃은 전봉준 또는 동학혁명을 가리키는 뜻이 된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낱말의 풀이가 엇갈리기도 하고 심지어 파랑새는 전자의 파자로「팔왕새」로 새기는 이도 있으나 글자풀이로서가 아니라 이 노래의 정신이 녹두장군(전봉준)을 응원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가보세 가보세/을미적 을미적/병신 되면 못 가보리.」이 노래는 황토재 혁명탑에 새겨져있는데「가보」(갑오)년에 성공 못하면 을미(을미)적 대다가 병신(병신)년에는 실패한다는 암시가 들어 있어 역시 민심이 짜낸 노래의 지혜를 맛보게 한다.
1894년 12월 28일 혁명의 실패로 쫓기던 전봉준은 믿고 찾아간 순창 피노리에 사는 김경천의 밀고로 잡히는 몸이 된다. 서울로 압송되어 다섯 차례의 모진 심문 끝에 1895년3월 29일 교수대에서 시 한 수를 남기고 민중의 영웅은 사라져간다.
때를 만나니
하늘과 땅이 힘을 모아주고 운이 다하니
영웅도 할 바가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따랐거니
내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나라사랑의 마음
그 누가 알아주리.
(시내천지개동력 운거영웅부자모 애민정의아무실 애국단심 수유지)
한바탕 북풍이 몰아치는 배들 벌에 서서 그날 나부끼던 창칼의 아우성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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