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이중간첩이 KGB에 넘긴 정보, 한반도 운명을 바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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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1호 26면

[제3전선, 정보전쟁]  이중스파이 〈하〉

1950년 말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 대열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중앙포토]

1950년 말 한국 전선으로 향하는 중공군 대열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중앙포토]

1985년 5월 워싱턴주재 소련 대사관의 발레리 마르티노프와 세르게이 모토린이 갑자기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처형됐다. 두 사람은 미 연방수사국(FBI)이 포섭한 정보 협조자들이었다. 그들 뿐 아니라 중앙정보국(CIA)이 소련 정보기관에 구축해 놓은 협조망도 하나둘씩 제거되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졌다. CIA는 내부 밀고자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내사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CIA요원 에드워드 하워드가 마약과 성격 결함으로 해고된 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CIA 내부정보를 넘긴 사실을 밝혀냈다. 하워드를 적발해 냈지만 정보는 계속 새나갔고, 소련에서 진행중이던 비밀 정보작전이 대부분 발각됐다. 패닉에 빠진 CIA는 진짜 내부 첩자를 찾아내기 위해 원점에서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망명한 KGB 요원의 정보로 꼬리 잡아

그러던 중 1989년 행운이 찾아 들었다. KGB의 암호부서 요원이 미국에 망명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CIA 내부에 KGB의 이중스파이가 있으며,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KGB와 여러 번 접촉했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CIA는 이 정보를 토대로 내사한 결과 CIA의 소련 담당관인 올드리치 에임스가 자주 보고타를 여행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에임즈는 미국내 소련 스파이를 잡는 임무를 맡고 있어서 그가 소련 첩자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에임스가 월급에 비해 씀씀이가 큰 점을 수상히 여긴 CIA와 FBI는 1991년 합동조사팀을 만들어 은밀히 조사에 착수했다. 우선 대법원 산하 외국정보감시법원(FISA Court)에 비밀영장을 청구했다. 이 비밀영장은 외국스파이 수사를 위한 특별영장제도로, 변호사없이 검사만 출정하고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 심리하며 영장판결문도 공개하지 않는다. 간첩수사는 보안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비밀영장을 발부받은 조사팀은 1993년 9월 에임스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난 사이 집을 수색했더니 놀랄만한 내용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KGB와 주고받은 서신은 물론 미국이 소련 정보기관에 구축해 놓은 이중스파이 명단, CIA가 소련에서 진행중인 비밀작전 내용이 다 들어 있었다. 그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수수께끼가 다 풀렸다. 에임스가 KGB의 이중스파이였다.

설마가 사실로 드러나자 CIA는 허탈했다. 도둑에게 금고를 맡긴 격이다. 에임스의 이중스파이 동기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불륜에 빠진 에임스가 돈이 필요해 자발적으로 이중스파이를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1969년 낸시와 결혼한 에임스는 1981년 콜롬비아주재 미 대사관에 근무하는 동안 문화공보관으로 일하던 마리아 카사스와 불륜에 빠졌다.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부인 낸시와 이혼했다. 그런데 카사스의 사치벽 때문에 부채를 많이 진데다, 낸시에게 이혼위자료까지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 압박이 심했다. 결국 그는 1985년 4월 워싱턴주재 소련대사관을 찾아가 먼저 이중스파이 활동을 제안했다. 소련은 즉석에서 승낙하고 5만달러를 지급했다. 이후 총 270만달러를 지급한 소련은 아주 저비용으로 이중스파이를 손쉽게 확보했다.

미군의 6·25전쟁 극비계획을 소련에 넘긴 영국 이중스파이 헤럴드 필비. 그가 넘긴 정보를 토대로 중국은 안심하고 6·25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다. [중앙포토]

미군의 6·25전쟁 극비계획을 소련에 넘긴 영국 이중스파이 헤럴드 필비. 그가 넘긴 정보를 토대로 중국은 안심하고 6·25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다. [중앙포토]

에임스는 1994년 4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으로 CIA는 소련내 핵심 정보망이 와해되고 비밀 정보작전이 일시 중단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2001년에는 FBI에서 러시아 업무를 담당하던 로버트 한센이 KGB의 이중스파이였음이 드러났다. 정보당국 전체가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는 등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또한 내부적으로는 전례없는 정보윤리 문제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영국도 이중스파이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특히 케임브리지대 출신 5명으로 구성된 소위 ‘케임브리지 5인방 스파이사건’은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상류층 엘리트 출신이 소련을 위해 조국을 버린 배반적 행위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과 파시즘의 여파로 유럽 사회가 혼란을 겪자, 이들은 소련 공산주의만이 유럽의 새로운 미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지켜본 KGB가 이들을 포섭해 졸업 후 각각 영국의 해외정보기관(MI6), 국내정보기관(MI5), 통신정보기관(GCHQ), 그리고 외무부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KGB의 지시대로 정보기관에 위장 취업한 이들은 영국의 대(對) 소련 비밀 정보전 내용은 물론 냉전초 미국과 영국의 핵무기 개발 정보를 소련에 넘기는 등 서방의 안보에 악영향을 미쳤다.

1994년 2월 21일 체포되어 재판에 출석하는 CIA의 KGB 이중스파이 올드리치 에임스. [중앙포토]

1994년 2월 21일 체포되어 재판에 출석하는 CIA의 KGB 이중스파이 올드리치 에임스. [중앙포토]

5인방의 이중스파이 활동은 한반도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5인방의 핵심인 해럴드 필비가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의 정보담당자로 근무하면서 당시 미군의 6·25전쟁 극비계획을 소련에 넘겼는데, 여기에는 ‘중국이 6·25 전쟁에 참전해도 미국은 원자탄을 쓰지 않고 중국 본토로도 확전하지 않는다’는 백악관 결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보 덕분에 중국은 안심하고 6·25 전쟁에 개입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뼈아픈 대목이다.

영국은 이들을 체포할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확실한 증거 부족으로 인해 정보기관에서 퇴직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1954년 4월 KGB의 블라디미르 페토로프가 망명해 필비의 행각을 폭로하자, 필비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을 이념 논쟁의 피해자로 포장하며 부인했다. 영국 정부도 필비의 이중스파이 증거가 없다고 발표해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러나 1961년 12월 KGB의 아나톨리 골리친이 영국에 망명해 필비의 이중스파이 증거를 제시하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필비는 1963년 1월 베이루트를 거쳐 소련으로 탈출했다. 필비는 소련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영국 MI6의 이중스파이 조지 블레이크 사건도 한국과 관련이 있다. 1948년 주한 영국대사관 부영사로 서울에 왔다가 6·25 전쟁을 만나 이중스파이가 됐기 때문이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포로가 된 그는 북한으로 끌려가 거기서 소련 정보당국에 의해 이중스파이로 포섭됐다. 휴전 후 MI6에 복귀한 블레이크는 동유럽에서 활동중인 서방 정보요원 명단을 소련에 넘겨 무려 40여명의 서방요원들이 희생됐다.

신냉전 시대 미·중 이중스파이전 가열

정보전쟁

정보전쟁

이처럼 세계사에서 이중스파이전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냉전 시기였다. 통상 이중스파이가 되는 동기는 돈, 강압, 이념, 복수, 불만, 자존감 등이다. 그러나 냉전기 이중스파이는 이념이 가장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거물급일수록 더욱 그랬다. 이념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중스파이로 인한 파장도 예상보다 컸다. 〈상〉편의 고르디옙스키나 펜콥스키 사례에서 보듯이 이중스파이는 일국의 안보정책을 뒤흔들거나 진행중인 정보전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다. 반면, 수혜국 입장에서 보면 이중스파이는 저비용 고효율의 정책수단임이 다시 한번 입증됐다. 냉전초 소련이 이중스파이를 통해 서방의 핵개발 정보를 빨리 입수해 조기에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서방과 핵 균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좋은 예다. 특히 이중스파이의 순기능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이중스파이가 때로는 적대국간 상호 오해를 풀어줘 오판에 의한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예방해주었기 때문이다. 냉전이 절정으로 치닫던 80년대 중반 소련 KGB의 이중스파이들이 이 역할을 많이 했다. 제3자의 눈으로 보면 이 이중스파이들은 비밀외교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전환기에는 정보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중스파이전도 활발해진다. 치열한 패권경쟁을 펼치고 있는 현재의 미·중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9년 미국 법원은 전직 CIA요원인 중국계 제리 춘 싱 리가 중국내 CIA협조자 명단을 중국에 넘겨 10여명이 처형되도록 만들었다며 19년 형을 선고했다. 이처럼 미·중간에는 이중스파이전이 본격화되고 있는 분위기다. 그 구체적 양상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띨지 궁금해진다. 자국의 정책 목적을 달성시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든, 미·중간 불신과 오해를 해소시켜주는 비밀외교 역할을 하든, 또는 양국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든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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