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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신사옥, 시민 자부심 높일 대안 찾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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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함인선 한양대 특임교수·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

함인선 한양대 특임교수·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들어설 현대자동차그룹의 신사옥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의 설계 변경안을 놓고 서울시와 현대차가 힘겨루기에 나섰다. 현대차가 당초 계획한 105층 타워를 55층 2개 동으로 변경한 조감도(사진)를 공개하면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인허가권자인 서울시는 랜드마크를 짓는 데 대한 보상으로 용적률을 올려주고 기부채납분도 줄여준 만큼 변경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반면 현대차는 공사비 상승 등으로 여건이 달라졌다고 항변한다.

설계 변경안은 지난 2월 접수됐지만, 105층 포기에 대한 암시는 2021년부터 있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영 환경 악화, 잠실 롯데 타워에 빼앗긴 초고층의 상징성 등을 고려해 정의선 회장 체제가 실용성을 앞세웠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논란이 이어져 사업이 지연되면 2020년부터 터를 파고 있는 사업주는 물론 GTX-A 삼성역이 포함된 영동대로 지하 복합개발도 덩달아 늦어져 부수적 피해가 따를 전망이다.

105층 마천루 지을 계획이었으나
건설비 급등하자 55층 2개동 추진
도시경관 관련 성숙한 논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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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워 보이는 것은 이 사업이 ‘협상에 의한 지구단위 계획’ 방식으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건축 허가라면 100층이든 50층이든 판단은 사업주 몫이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105층 높이가 공공성에 대한 기여라고 판단해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준 서울시는 105층 높이를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처지다. 그렇다고 사기업이 손해를 무릅쓰며 건물 짓기 어려우니 이래저래 난감하다.

제도적 문제와는 별개로 서울시와 현대차는 피차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다. 105층에 대한 가치 기준이 서로 현격히 달라 보여서다. 이를 이해하려면 초고층 타워의 경제성과 상징성 사이의 딜레마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초고층 타워는 경제적으로는 가장 어리석은 건물이지만, 도시 경관 측면에서는 가장 강력한 상징물이다.

높아질수록 건물 구조를 결정하는 변수는 무게가 아니라 바람·지진 같은 횡력이다. 횡력에 저항하는 타워는 하단부의 힘이 높이의 제곱에 비례해 커진다. 풍압도 높을수록 강해지므로 결국 세제곱 이상의 힘을 견디는 구조가 필요하다. 요컨대 50층보다 100층은 2배가 아닌 8배 이상의 구조비용이 든다.

더구나 엘리베이터 등이 차지하는 면적도 비례해 늘어나 가용 면적이 줄기 때문에 효용 측면에서 초고층은 난센스다. 결국 대지는 협소한데 비싼 땅값으로 연면적의 극대화가 필요한 미국 뉴욕 맨해튼 같은 곳에서나 타당성이 생긴다. 현대차 부지는 아니다.

초고층 건물은 상징자본 역할로는 으뜸이다. 땅값이 없다시피 한 중동의 모래밭과 한적한 중국 지방 도시에 치솟은 타워들이 노리는 효과다. 높이 경쟁은 명성을 위한 전쟁임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1930년 뉴욕의 ‘40 월스트리트’ 빌딩이 최고층 자리를 차지하자 경쟁하던 ‘크라이슬러 빌딩’이 공사 막판에 숨겨놓은 첨탑을 내밀어 타이틀을 가로챘다. 그러나 한 해도 못 넘겨 역시 첨탑을 높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최고층 자리를 내줬다.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부터 중세 도시의 고딕 성당까지 중력과 바람을 거슬러 솟아오른 수직성은 권력의 상징이자 도시의 부와 위신의 기표였다. 글로벌 도시를 지향하는 서울시가 크게 다를 리 없을 것이다.

현대차는 실용성과 경제성만 고려하기에 앞서 105층 타워에서 공공과 시민이 어떤 가치를 기대했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건설 비용을 절감하는 대신 미래 성장동력이 될 ‘도심 항공 모빌리티(UAM)’ 착륙장 등을 건설하겠다지만 그것이 타워의 상징성을 대체할 만한지는 의문이다. 돈이 아니라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자부심을 높일 공공기여를 찾아야 한다.

이는 서울시도 풀어야 할 숙제다. 원안 고수라는 쉬운 길 대신 이 시대 서울의 랜드마크가 꼭 높이여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서울의 지향은 가장 높은 타워를 가졌으면서도 ‘극장 도시’라는 오명이 따라붙은 두바이인가, 아니면 낮게 깔렸으되 매력적인 수평적 랜드마크가 차고 넘치는 워싱턴이나 파리인가.

단순히 105층이냐 55층이냐가 아니라 이는 도시 철학의 문제로 직결된다. 어떤 결과에 이르든 삼성동 GBC 타워를 둘러싼 논란은 도시경관 결정에 대한 한국사회의 성숙도를 가늠할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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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선 한양대 특임교수·광주광역시 총괄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