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정부의 실력, 이대로 괜찮습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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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이 정도면 가히 ‘정책 참사’다. 사흘 만에 해프닝으로 끝난 ‘해외 직구(직접구매) 차단’ 얘기다. 정부가 내놓은 정책의 내용도 허술했지만, 혼란이 빚어진 이후 대응도 당장의 면피에 급급했다.

소비자의 반발이 거세지자 휴일인 19일 정부는 부랴부랴 브리핑을 열었다. 그리고는 “80개 품목에 대한 해외 직구를 사전 차단·금지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진의’는 소비자 안전에 위험을 주는 제품을 조사해 차단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제대로 설명을 못 해서 오해가 빚어졌다는 취지였다.

C커머스 공습에 꾸린 정부TF
불쑥 ‘직구 차단’ 내놨다 철회
내수용 ‘안방 호랑이’의 참사

정말 그럴까. 지금도 국무조정실 홈페이지에 떠 있는 16일 자 보도자료를 다시 읽어봤다. 대책의 가장 첫머리에 어린이 제품(34종), 전기·생활용품(34종), 생활화학제품(12개) 80개 품목을 언급하고 “국내 인증(KC)을 받지 않은 경우 해외 직구를 금지”한다고 명시해놨다. 참고자료에는 80개 품목에 들어가는 구체적 제품까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고, 시행 시기는 올해 하반기로 표기해놨다. 뭘 하겠다는 건지 너무 명확해 오해를 일으킬 만한 대목은 눈에 띄지 않는다.

정부의 해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이번 대책 마련을 위해 3월부터 범정부 차원의 태스크포스(TF)가 꾸려졌다고 한다. 국무조정실이 총괄하고 산업부, 환경부, 식약처, 공정위, 관세청 등 14개 부처가 참여했다. 정부 자료에 따르면 TF는 “두 달간 20여 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분야별로 면밀한 검토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를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 장관 회의를 연 뒤 발표했다. 정부 설명대로라면 핵심 정책의 ‘진의’가 잘못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이 과정에서 그 누구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정부가 실제로 의도했다는 ‘위해성 확인 시 차단’은 지금도 하는 일이다. 그걸 좀 더 열심히 하겠다는 걸 무려 14개 부처가 참여한 TF의 최우선 대책으로 내세웠다는 건데, 정책의 생리를 안다면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그보단 무능하다는 비판을 피하려 차라리 무책임을 택한 형국이다.

물론 TF가 맞닥뜨린 문제가 복잡하긴 했다. 알리·테무를 필두로 한 중국 온라인쇼핑 플랫폼(C커머스)은 초저가를 앞세워 폭발적으로 이용자를 늘렸다. 갖가지 문제가 속출했다. 유통업체는 물론 중소 상인, 제조업체들 사이에서 “이대론 다 죽는다”는 아우성이 빗발쳤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제품의 범람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이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국이 과잉생산한 공산품을 전 세계로 밀어내는 이른바 ‘디플레 수출’에 나서며 지금 전 세계는 홍역을 앓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무작정 막을 순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소비자와 생산자, 무역 상대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계 각국 정부가 규제의 명분과 함께 실효성을 갖춘 수단을 찾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예상과 달리 너무나 쉽게 해답을 꺼내 들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문제라면 국내 정식 수입 업체들처럼 직구 상품도 KC 인증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소비자 선택권보다는 업계 보호에 중점을 둔 셈인데, 정작 업계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해외 직구로 국내에 들어오는 상품이 하루 수십만 건인데 무슨 수로 인증 여부를 일일이 가리겠냐는 것이다. 명분은 물론 실효성도 부족한 답이란 얘기다. TF가 소비자나 업계의 의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면 그냥 넘기기 어려운 지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하듯이 거칠게 규제부터 들이댔고 망신을 자초했다.

결국 이번 소동은 우리 정부의 실력이 여전히 ‘안방 호랑이’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산업정책 시대로의 회귀’란 말이 나올 정도로 정부의 역할과 경쟁력이 중요해진 상황에서다. 정부가 일으킨 혼선을 놓고 여야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잇따른다. 하지만 정작 우리 유통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규제를 푸는 문제에 대해선 별다른 말이 없다. 이래서야 경제와 안보 논리가 뒤섞인 ‘라인 사태’ 같은 새로운 갈등에 어떻게 제대로 대응하리라 기대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이 기자간담회에서 한 문제 제기가 세간에 화제가 됐다. “과거에 해왔던 대로 계속해서 가면, 대한민국은 괜찮은 겁니까”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세상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재래식 사고만으로 해법이 나오겠냐는 얘기다. 글로벌 무한 경쟁의 최전선에 선 기업인이 오죽하면 이런 철학적 화두까지 던졌을까 싶다. ‘직구 금지’ 소동을 보면서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대로 괜찮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