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참으로 어렵구나, ‘참꼰대’ 노릇 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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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꼰대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5월에는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지만 스승의 날이라는 다소 어색한 날도 있다. 직업적 ‘꼰대’의 일원으로서 5월을 맞아 ‘꼰대’에 대해서 생각한다. ‘꼰대’란 무엇인가?

꼰대라는 멸칭의 역사

동아일보 1961년 2월 10일 자 기사가 ‘꼰대’를 ‘영감 걸인’이란 뜻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오늘날 용례와 거리가 있다. 그 후 신문 지상에서 꼰대라는 말이 나오지 않다가 경향신문 1970년 11월 13일 자 기사가 선생의 멸칭으로서 꼰대라는 말을 소개하고 있다. 멸칭으로서 선생이라는 뜻은 오늘날 꼰대 용례에도 들어 있으니, 적어도 반세기 동안 꼰대는 그 기본적인 뜻을 꾸준히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세대갈등 심각한 지금 이 사회
꼰대 넘쳐도 참꼰대는 드물어
아부와 인기 대신 진리를 추구
꼰대 확산 방지 위해서도 절실

생각의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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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대학교수 소광희는 ‘어떤 시점에 설 것인가’라는 칼럼을 경향신문 5월 16일 자에 기고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대학생은 성인이기 때문에 자기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기도 하려니와 학생들 자신마저도 이제는 선생의 인격적 간섭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 큰 녀석 보고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오히려 ‘꼰대’ 소리나 들었지 별수 없다.”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과 유사한 의미다. 파생적 의미는 차치하고, 꼰대의 기본 의미는 학생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선생(혹은 아버지)을 지칭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1982년 11월 14일 자 기사에 “우리 젊은이들이 나이 먹은 세대를 비꼴 때 꼰대라 하듯이”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선생과 아버지를 넘어 세대 일반까지 꼰대의 의미가 확장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이 사회에는 꼰대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세대 간 차이는 늘 존재하고, 남에게 (주제넘게) 가르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니 말이다. 꼰대가 많은 만큼 꼰대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꼰대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꼰대는 사라지지 않고 이토록 득실거리는 것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참꼰대’가 부족해서가 아닐까.

‘꼰대’와 ‘참꼰대’

꼰대가 되지 않는 지름길은 학생의 기분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학생이 무슨 말을 하든 “과연 그렇군. 허허, 자네 말에 일리가 있네”로 일관한다. 그렇게 하면 상대는 적개심을 품지 않고, 자존심 ‘뽕’이 차오르며, 듣는 상대를 우군으로 간주하고, 기분 좋은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그 넘쳐나는 자신감을 에너지 삼아 차세대 꼰대로 무럭무럭 자란다. 학생이 무슨 글을 쓰든 “멋진 글이군. 허허. 아주 훌륭한 글이었어”라고 일관한다. 그렇게 하면 학생도 기분이 좋고, 자존심 ‘뽕’이 차오르며, 선생을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는 향상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차세대 꼰대로 성장해 간다.

꼰대가 되는 지름길은 무엇인가? 학생이 무슨 말을 하든 “또 개소리를 하는군. 자네는 말을 하는 건가, 짖어대는 건가”라고 폭언을 해대는 것이다. 학생이 무슨 글을 쓰든 “또 쓰레기 글을 썼군.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종이에 아니 노트북 키보드에 죄를 짓는 일이야.” “머리통은 야구모자 거치대가 아닐세. 생각이란 걸 좀 하게.” 실로 과거 이 사회에 이런 꼰대는 넘쳐났으며, 지금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참꼰대는 드물다. 저렇게 말 펀치를 날린다고 참꼰대가 되지는 않는다. 참꼰대의 길은 사뭇 다르다.

참꼰대는 학생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 부분에서 논리적 비약이 좀 있는 것 같네. 어떻게 하면 그 비약을 피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시다.” 어떤 부분에 어떻게 논리적 비약이 있는지를 판별하려면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참꼰대는 경청하는 자이자 논리적인 자이다. 참꼰대는 학생의 글을 읽고 이렇게 말한다. “청중과 논지와 구성과 문체가 따로 노는 것 같군요. 청중과 논지와 구성과 문체가 잘 호응하는 문체로 쓰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네요.” 이렇게 조언을 하려면 학생의 글을 읽으며 그 글의 청중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하고, 논지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구성을 판별해야 하고, 문체를 잘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참꼰대는 상상하는 자이자, 논리적인 자이자, 판별하는 자이자, 감각하는 자이다. 그러니 참꼰대가 되는 일이 쉽겠는가. 게다가 참꼰대의 수업은 쉽지도 않고, 학점도 엄격하게 줄 터이니 학생들로부터 인기를 얻기도 어렵다.

진리가 중요한가, 인기가 중요한가

참꼰대는 인기에 연연해서 젊은 세대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젊은 세대에게 아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너희들은 잘못이 없다! 이것은 다 기성세대 탓이다!”라고 (조용히 자책하는 대신) 대놓고 외치는 것이다. 자책의 포즈는 자만의 포즈보다 덜 재수 없기 마련. 게다가, 젊은이 탓을 하지 않으니 젊은이 기분이 나쁠 리 없다. 그러나 참꼰대는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 젊은 세대에게 아부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학생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가르치는 것은 아니죠. 함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가르치는 거예요. 사랑? 우웩! 사랑이야 일종의 부산물로서 생길 수도 있고, 생기지 않을 수도 있겠죠. 사랑받기 위해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사랑받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고 토론하는 건 아닙니다.” 이런 참꼰대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이지 인기가 아니다.

그러면 참꼰대는 기성세대에게 아부하는가? 그렇지 않다. 기성세대의 비위도 맞추지 않는다. 기성세대에게 아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철없는 젊은이들이 타락하고 있소. 지혜와 경륜을 갖춘 우리가 나서야 하오!”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지난 세월을 헛산 것 같지도 않고 지금도 사회적 쓸모를 인정받는 것 같아서 기성세대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꼰대는 이런 길도 가지 않는다. 참꼰대는 세대를 막론하고 자신과 타인을 모두 냉정하게 평가할 뿐이다. “누구든 타락할 수 있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맛’이 갈 수 있다.” 참꼰대는 학생의 선택권 존중이란 명분으로,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중요한 결정을 학생에게 미루지 않는다. 그것은 교육의 타락이라고 생각하기에.

미국에서 만난 ‘참꼰대’

미국에서 참꼰대를 만나 본 적이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엄격한 사람이었으나 학생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이제 거의 전 세계적으로 퍼진 학점 인플레 현상 앞에서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학생들에게 정도 이상으로 좋은 학점을 주는 일은 학생들에게 아부하는 짓이다. 그로 인해 학생들은 자기 상태에 대해 그릇된 평가를 하게 되고, 결국 망가지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 학생들에게만 학점을 박하게 주면, 쉽게 좋은 학점을 얻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피해가 가지 않겠나.” 이러한 고민 끝에 그 교수는 자신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학점을 두 개씩 주었다. 하나는 성적표에 기재되는 좋은 학점, 다른 학점은 그들의 실제 상태를 나타내는 학점. 후자의 학점이 전자의 학점보다 낮았을 것은 당연하다. “성적표에 실린 학점을 믿고 착각하지 마세요.”

이 사회에서 사회적인 원로나 어른이 되는 일은 참꼰대가 되는 일에 비해 쉬운 것 같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런저런 상을 연거푸 타거나, 정치력을 발휘해서 대규모 제자 그룹을 조직하거나, 큰 보직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면 원로나 어른 대접을 받을 공산이 크다. 그도 아니라면 스트레스를 피하고 건강 유지를 잘하여 남들보다 아주 오래 살면 원로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참꼰대가 되는 길은 험하다. 실력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본인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냉정한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피평가자에게 아부하지 말아야 하고, 미움받을 용기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강심장이어야 한다.

꼰대의 재생산을 막으려면

그러니 이 사회에 참꼰대가 없거나 드문 것도 이상하지 않다. 참꼰대가 되는 일은 꼰대가 되지 않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참꼰대가 없으면 뭐 어떠냐고? 그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해 보라. 참꼰대가 없으면 꼰대를 ‘제대로’ 미워하기도 어렵다.

오늘날 꼰대를 미워하거나 조롱하는 일은 너무 쉽지 않은가. 자기 편견에 기대어 비방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적수가 강력해야 자신도 성장하는 법. 쉽게 나가떨어지는 이를 상대로 백전백승하는 사람이 자기반성과 자기 단련에 애쓸 리 없다. 매번 승자가 되는 데 자신을 굳이 돌아볼 이유가 없지 않겠나. 그러다 보면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 자신도 꼰대가 되어 간다. 육체적 군살만이 아니라 정신적 군살이 늘어나고, 육체적 근육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근육도 사라진다. 남는 것은 근거 없는 자존심과 세상 탓뿐이다. 근거 없는 자존심으로 남 탓하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바로 꼰대 아니겠나. 이것이 바로 꼰대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조롱에도 불구하고 꼰대가 끝없이 재생산되어 온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참꼰대가 없으면 젊은 세대는 자신을 점검할 기회를 잃고, 예리한 비판의 날이 무디어지고, 어느 날 정신 차려 보면 그 자신 꼰대가 되어 있지 않겠나. 꼰대의 재생산을 막기 위하여 참꼰대가 필요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