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 내린다[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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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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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어크로스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적어도 말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두 지은이는 정치인들의 행동을 두고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를 구별한다. 특히 '자신과 관련된 세력'이 폭력적이거나 반민주주의적인 행동을 했을 때 보이는 반응을 이들을 판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도 이런 이들을 개인적·공식적으로는 거부한다. 하지만 당의 분열이나 지지 기반 상실 등의 두려움을 느끼면 묵인하거나 암묵적으로 연합한다.

2021년 1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폭력적인 시위대가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모습. [AP=연합뉴스]

2021년 1월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폭력적인 시위대가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모습. [AP=연합뉴스]

반면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이런 이들을 내쫓고, 확실하게 관계를 끊는다. 나아가 필요한 경우에는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경쟁 정당은 물론 정치적 이념이 정반대인 정치인과도 손을 잡는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에는 내전을 겪었거나 쿠데타를 수차례 경험한 나라들을 비롯해 이런 정치인들의 행동이 거둔 긍정적 사례를 소개한다. 저자들은 반대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이 독재주의자들과 연합한 경우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비법으로 작용했다고 전한다.

물론 현대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 무력이나 쿠데타만은 아니다. 최근에는 반대의 경우가 두드러진다. 책에는 거시적 차원에서는 헌법을 따르지만 합법적인 기술을 통해 그 정신을 훼손하고, 법의 허점을 이용하고, 과도하거나 부당하게 법을 사용하고, 법을 선택적으로 집행하는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린 여러 나라의 사례가 나온다. 특히 헝가리 오르반 정부를 대표적인 예로 꼽으며 의회·사법부·언론·선거관리위원회를 차례로 장악한 과정을 전한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완전히 성숙한 민주주의를 허물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거의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저자들이 걱정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이 책의 서문에도 나오듯 트럼프의 대선 패배가 드러난 직후인 2021년 1월 그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공격한 일은 전 세계는 물론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과연 이것이 트럼프라는 예외적인 인물 때문일까. 저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퇴보하고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여러 원칙, 미국의 각종 제도를 되짚는다.

저자들은 "정당이 지는 법을 배울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뿌리를 내린다"고 책에 썼다. 정당이 패배를 인정하기 어려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에 대해 여러 역사적 사례를 전한다. 책에 따르면 사실 1800년대초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가 벌어질 때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이를 비롯해 책 곳곳에 등장하는 역사의 여러 대목은 미국의 헌법과 제도가 흔히 생각하듯 고고한 이상에 따라 모두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라 종종 타협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평등과 투표권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이를 제한하는 '합법적' 수단이 여럿 동원됐는가 하면 이를 개정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책은 지금과 사뭇 달랐던 미국 공화당이 백인 기독교도를 주요 지지층으로 삼으며 변화한 과정도 짚는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미국의 헌법과 제도가 지닌 취약점을 지적한다. 선거인단을 통한 대통령 선출,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하지 않는 상원의원 숫자, 연방대법관의 종신제와 의회의 필리버스터.... 그 낱낱의 문제들은 이런 제도가 다수의 의견을 대변하는 대신 책 제목에 나오는 대로 소수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라는 저자들의 주장과 맞물린다.

전작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로 큰 주목을 받은 저자들의 이 신작은 지난해 영문판이 나왔다. 신작에서 저자들이 잠시 드러낸 안도감과 달리 지금 트럼프는 다시 미국 대선 후보로 가시화하고 있다. 저자들이 인용한 대로 오래된 민주주의, 부유한 나라의 민주주의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통념은 미국에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 겨냥하는 초점은 미국이되, 정치적 이력을 위해 '내 편'의 극단주의나 반민주적 행동을 용인하는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에 대한 경고를 비롯해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한 이 책의 주장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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