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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을 풍미한 말…말…말…|'총체적 위기"서 "권-폭 유착"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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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3당 통합이란 충격적인 정계 개편으로 막이 오른 올해의 정국은 통합에 대한 시비와 여파로 야당 의원 사퇴소동·야권통합 움직임을 빚어내면서 정치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제안한 지 1년 8개월만에 이뤄진 남북 총리회담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세 차례나 서울·평양에서 열렸고 통일 축구대회·통일 음악회 등 남북 교류가 6·25·이후 가장 활발했다. 노태우 대통령과·고르바초프의 샌프란시스코 회동·한-소·수교 등 북방 정책이 결실을 본 해이기도 하다. 급박하게 돌아간 한해를 사건 속에 부침 했던 말들을 통해 조감해 본다.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1월 22일 민정·민주·공화당 등 보수 3당이 전격적으로 통합을 선언,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정계가 여소야대에서「거여소야」로 일시에 바뀌었을 뿐 아니라 정국 운영 방향도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
통합 움직임이「복화술」(김종필 공화당총재)로 이뤄지고 있는 동안 김영삼 민주당총재는 「신사고」와「혁명적 발상」을 거론했고 김종필 총재는『진천 동지 할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고.
1월 22일 3당 통합을 선언한 자리에서 합당을 정당화, 노 대통령은『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명예 혁명이라고 자찬. 김영삼 총재는『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했으며 김종필 총재는『국민을 위한 무한 봉사』라고 해석.
설마 하던 평민당은 막상 3당 통합이 현실로 나타나자『3당 통합이 아닌 3당 야합』 이라며 원색적인 용어로 일제히 포문.
김대중 평민당총재는『제1유신은 72년 군사 쿠데타이고 3당 통합은 야당을 끌어들인 제2쿠데타』라며『3당 야합은 국민 주권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비난.

<좌 영삼·우 종필론>
평민당 의원들은「민정 각본·공화당 연출·민주 주연의 졸작 품」(한광옥 의원)·「밀실 야합」(김태식 대변인)이라고 퍼부어 댔으며「장기집권음모」「호남고사작전」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1월 22일 청와대에서 통합 창당 선언 때 노 대통령을 가운데로 김영삼·김종필 총재가 양옆에 서 있는 것을 빗대어「좌 영삼·우 종필」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3당 통합과 함께 1노 2김 사이에 앞으로의 권력 승계에 대한 모종의 밀약이 있었다는「대권밀약 설」이 한때 파다. 1노 2김간의 역할 배분을 놓고도「합의제」니「협의제」니 여러 말이 나왔는데 김종필 최고위원이『나는 주역이 아닌 조역』이라고 낮춰 3인간의 위상을 조정.「민자당」이름이 일본 자민당과 비슷해 말들이 많았고 세 최고위원도 가끔 혼동을 일으켜 김대중 총재는『유신 때는 일본 명치유신을 모방하더니 당 이름까지 흉내냈다』며 『일본 자민당의 한국지부』라고 혹평.
그러나「구국적 결단」에서 탄생됐다던「거여」는 이질적 정치 세력간의 인위적 연합 구도 속에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두 번씩이나「가출」하는 등 당권 및 차기 대권을 둘러싼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첫 번째 통합 몸살은 3월 김영삼 대표의 모스크바 방문 때.
김 대표의 방소단에 박철언 정무장관을 포함시키자 박 장관은「수행」이 아닌「동행」이라고 굳이 주석을 달아 김 대표와 동격임을 은근히 주장.
방소 기간 중 김 대표가 고르바초프를 만나 회담했다고 하자 박철언 장관은 이를 잠깐 면담한 것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등 곳곳에서 충돌을 연출.
화가 난 김 대표는 귀국 후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회의에 불참하는「토요일의 쿠데타」를 일으키며 내전에 돌입.
김 대표는 자신의 자금 동원 등에 대한 기관의 뒷조사 등을 예로 들며「공작정치」타파를 주장하자 박 장관은『내가 합당 비사를 공개하면 YS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라는 발언으로 반격.
민주계는 벌떼처럼 일어나 박 장관을「제2의 이기붕·제2의 차지철」(김동영 총무)로 매도했고 결국 박 장관의 정무장관 사퇴(4월 14일)로 일단락.
김 대표의 두 번째 가출 소동은 본보의「내각제합의각서」공개(10월 25일)의 여파.
1노 2김은 통합전당대회 직전인 5월 6일 내각제를 추진키로 밀약을 하고 합의 각서에 서명.
5월 20일 이런 각서가 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했으나 김 대표는 부산에서 기자회견(7월 21일)을 통해『합의각서는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라고 딱 잘라 부인.
그러나 본보가 10월 25일자로 1노 2김이 자필 서명한「내각제합의각서」사본을 사진으로 공개하자 도덕성을 의심받게 된 김 대표는 또『공작정치』라며 반격을 시도.
각서전달 책임을 맡았던 박준병 민자당 사무총장은『관리 소홀로 도난 당한 것』이라고 했고 박태준 최고위원도『각서유출이 문제가 아니라 약속의 이행』이라며 비판.

<"비밀은 무덤까지">
사태가 어려워지자 김영삼 대표는『정치 지도자들간의 비밀약속은 무덤에 갈 때까지도 지켜야하는 것』이라며「마산행」을 결행.
민정·공화계 의원들은 김 대표의 마산행을「YS식 땡깡정치」라고 비난했고 민주계의원 일부가 탈당 서명을 해 민자당은 분당위기에 직면했으나「공생 아니면 공감」이란 위기의식 때문에 노 대통령과 김 대표는『통합정신을 재확인』하면서 사태를 수습.
국회가 거여 체제로 움직여 가는 가운데 7월 임시국회에서 방송 관계법·국군 조직법 등 26개 안건이 30여 초만에 날치기 처리되자 야당의원 79명이 사직서를 제출해 여당단독 국회가 출현.
국정감사는 민방지배주주로 태영을 선정한 데 대한 의혹 설에 집중돼「태영감사」라는 말도 나왔다.
7월 국회 때는 김영진 의원(평민)이 명패를 던져 최재욱 의원(민자)이 입을 다치고 문공위에선 신하철 의원(민자)이 조홍규 의원(평민)을 메다꽂는 사진이 게재돼『국회가 씨름판이냐, 난장판이냐』는 개탄이 흘러나왔다.
특히 박철언 의원이 사기 사건을 일으킨 수원의 대성봉 사회간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돼 물의를 빚었고 대전에서 판사·검사가 폭력배들과 술자리를 함께 한 사건이 터져「권·폭 유착」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정치 불신이 가중돼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70%정도로 나타나 정치권이 충격.「3김 퇴진론」「물갈이론」등 세대론이 다시 부상.
민주당 노무현 의원은 9월 3일 공개토론회에서『야권 분열은 김대중·김영삼 두 분의 아집·독선으로 벌어졌고 그들 깃발 아래 의원들이 줄을 서 악화됐다』고 했고 민자당 이종찬 의원은 9월 18일 서울 양천-갑 지구당 개편대회에서『우리 정치는 인물 성장을 억제하는 불모지대』라며 세대 교체론을 제시.


김영삼 민자당대표는 이에 대해『정치지도자의 조건은 민주화 투쟁경력』이라고 세대교체 론에 대항.
김종필 최고위원이『나에겐 벽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은 그걸 못 느끼고 있다』며 3김 동반 퇴진론을 폈으나 일부 언론이『자신부터 물러나라』고 오히려 김 최고위원을 공격해 언론계에「두 김 장학생」의문이 제기.
11월 28일 관훈토론회에서 한때 시류론을 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이 나라를 맡길 지도자가 없다』고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표명해 화제. 이에 화가 난 김대중 총재가 국정감사에 정 회장을 참고인으로 요구하라고 긴급 지령을 내리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김윤환 민자당총무도 11월 29일 국회를 견학 차 방문한 연세대 학생들에게 이 시대의 정치과제로 3기미 퇴진론을 얘기했다가 김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고『인위적인 세대교체는 어렵다』고 후퇴하는 소동.
4월에 실시된 충북 진천·음성 보궐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 허탁 후보가 금 배지를 따내 모두들 경악. 허 의원당선자는『이제 충청도는「멍청도」가 아닌「엄청도」가 됐다』고 기염.
그러나 민주당 홍사덕 부총재는 9월 1일 KBS-TV 심야토론에서 충청도사람들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유신 2인자인 김종필씨를 살려준 것은『멍청한 짓』이라고 해 충청도민들이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함평-영광 보궐선거에서는 평민당이 지역감정을 해소한다고 지역연고가 없는 경북출신 이수인 교수를 공천해 화제.
김대중 총재의 진두지휘로 이 후보를 서경원 의원보다 더 높은 75%의 득표 비율로 당선시켜『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말을 실감나게 했고 오히려 김 총재의 신화만 확인한 셈.
거여가 출현하자 야권에서도 통합 바람이 불어「3자 통합」등 협상이 활발. 7월 27일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재 추대된 김대중 평민당총재는 수락연설을 통해『평민당이 죽고 통합야당으로 부활해야 국민도 살고 우리도 산다』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보라매 대회로 통합 분위기가 고조됐으나 민주당의 소극적 태도로 지지부진.
김태식 평민당대변인은『가문 있는 집안에서는 결혼해 자식을 낳고 가업을 잇는 게 전통인데 민주당의 태도를 보면 독신으로 지내며 적당히 즐기려는 것 같다』고 민주당의 미온적 입장을 비아냥.
야권통합·2선 후퇴론에 시달리던 김대중 총재는 보안사 사찰 파동을 계기로 단식에 돌입해 13일간 단식.
김 총재 단식 중에 김영삼 대표가 갑자기 방문(10월 11일), 위로했는데 이때 양 김씨 간에 『대통령선거 때까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비밀 양해가 있었다는 소문으로 두 김 밀약 설이 유포.
특히 두 김 회동 전에 김동영 총무가 찾아가 두 김 중 한쪽이 망하면 다른 쪽도 성할 수 없다며 상부상조 논을 역설했다고 민정계 측은 의심.
두 김 회동에서 지자제문제 등이 거의 타결되고 평민당도 등원키로 해 양금 밀약 설을 뒷받침.
9월 4일 서울에서 남북총리회담 1차 회의가 열리는 등 남북교류는 중대한 진전.
우리측은 3통 협정과 인도적 교류를, 북한측은 불가침선언 등을 골자로 하는 기조연설 등을 했는데 군축문제가 정식 제기되는 등 표면상으로 화해의 바람.
연형묵 북측 총리는 기조연설에서 남측이 이른바「자유의 바람」을 북쪽으로 불어넣으려 한다며「개방」에 대한 북측의 민감한 입장을 노출.

<엄청도-멍청도 시비>
남북한 당국간 교류에 편승, 재야와 북측은 범민족 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로 했으나 마지막 순간 판문점까지 온 북측대표들이 휴전선을 넘지 않아 본지를 제외한 대부분 신문들이「평양대표 입경」 오보를 내기도 했다.
북측 주민들은 고위급회담 우리대표단이 평양에 갔을 때『임수경』과『조선은 하나』를 외치며 걸핏하면 눈물을 흘려 당황케 했다.
그러나 통일축구대회 때는 아시아경기대회 때 우리(2위)에 뒤져 4등한 것을 감춘 사실이 드러나 폐쇄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북회담에서 북측은 우리대표를 모두「선생」으로 불러 호칭문제로 신경전. 연 총리는 강영훈 총리를 계속『강 수석대표선생』이라고 불러 강 총리를 불편하게 했는데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연 총리는 노 대통령에게『대통령각하』라고 불러 예절을 갖췄다.
여러 갈래 남북교류 바람에「통일」이 도그마 화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어령 문화부장관은 『문화계마저「통일」이란 말에 지배당했다』고 뼈있는 성찰.
5월 2일 당정 회의를 마치고 나온 박희태 민자당대변인은『지금의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라고 해 올해의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 정착.
노 대통령은 현 시국이 총체적 난국은 아니며 위기가 아니라고 해명했으나『적어도 연말까지는 경제·사회의 안정을 이룩하겠다』고 비상한 각오를 피력(5·7선언)하고 재벌 비업 무용 부동산매각 등 조치를 발표.
노 대통령은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다시 10월「범죄와의 전쟁」을 선포. 사회의 혼란이 우려되는 가운데 카톨릭에서「내 탓이오」운동을 일으켜 상당한 호응을 받았고 이 바람에 정치권엔 걸핏하면「내 탓 네 탓」시비가 일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방일 기간 중인 5월 24일 일왕 아키히토는 일제 36년을 사죄하면서『통한의 염을 금할 수 없다』고 해 한동안 유행.
우리 정부는 이 표현을「뼈저리게 뉘우친다」라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일본 국내 사전에는「슬프고 애석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함」으로 돼있어 국내에서는 사과의 강도가 낮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다수.

<"통한의 염" 논란>
노 대통령이 6월 4일 전격적으로 미국을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회담함으로써 한-소 관계는 급진전.
두 사람이 회동한 샌프란시스코 시는「노 대통령 날」을 선포하기도 했는데 노-고르바초프 회담에서『우리의 통일도 독일 경우처럼 2+4형태가 되어있다』고 지적. 고르바초프는 『두 사람이 만난 것이 한-소 관계의 시작』이라고 했는데 9월 30일 정식 수교하고 12월 13일엔 노 대통령이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를 방문.
그러나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의 방소를『지나치게 성급하다』『사진 찍으러 간다』는 우려도 있었는데 노 대통령은 귀국해『이번에 가보고 내치가 중요한 것을 알았다』고 뒤늦은 실토.
10월 5일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민간인 사찰 명단 공개로「보안사 사찰파동」이 정가를 강타. 야권과 재야인사들은『당신은 합격했느냐』『올빼미 번호(사찰번호)가 몇 번이냐』등의 희화적 농담이 오갔는데 이 파동으로 국방장관이 경질되고 보안사가 대수술을 받았다.
이에 앞서 이문옥 감사원 감사관이 재벌의 비업 무용 토지판정 등 감사에 영향력을 미친다고 공개해 또 한 차례 파문.
이런 파동은 정부의 여전한 권위주의적 습성을 드러낸 것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정부 내부의 보안 유지에 문제점도 노출시켜「권력누수현상」「레임덕 현상의 시작」이라는 지적도 있다.
온갖 곡절 속에서도 여야는 지자제 관계법을 통과시켜 30년만에「풀뿌리 민주주의」가 소생.
민자당은『노 대통령의 민주화 의지 때문』으로, 평민당은『의원직 사퇴와 김대중 총재의 단식 때문』이라고 서로 공자랑.
협상과정에서 평민당은 중선거구와 비례대표제를 강력히 주장했는데 김대중 총재가『오죽하면 비례대표라도 팔아 선거자금을 마련해야 하는가』고 해 비례대표제 판매설을 인정하는 실수.
이 때문에 비례대표제가 아닌「비료대표제」니「입도선매설」이 나돌아 김 총재는 황급히 비례대표제를 철회.
농어촌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은「UR태풍」으로 비유.
농민들은 정부의 뒤늦은 대책에 반발하며『우리농촌 죽이는 UR협상반대』『갑오농민 전쟁(동학혁명) 이래 최대위기』라며 시위와 압력을 가중. 정부는 뒤늦게『개방이 돼도 10년 유예기간이 있다』『UR 거부하면 국제사회 고아된다』고 설득했으나 농민들은「살농정책」「폐농정책」이라며 농민대회개최 등을 시도하는 등 정부측과 대결.
이 바람에 강보성 농림수산장관이 농어민 후계자 대회에 참석 못했고 농민모임에서 연설하려다 욕설만 들었다.
그러나 UR협상의 타결이 실패하자 이번엔 미국 측이「노 대통령의 위약」을 들고 나와 불쾌감을 표시하고 무역 압력을 가해 정부는 안팎 곱사등이 꼴.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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