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인혜의 방방곡곡 미술기행

산에 미쳤던 감응의 화가, 매번 달랐던 벚꽃 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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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고석의 쌍계사 벚꽃길

김인혜 미술사가

김인혜 미술사가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다가 ‘감응(感應)’이 일어나면 그림을 그린다는데, 나는 반대다. 아름다운 그림을 보다가 감응이 일면, 그 장소를 찾아가 보고 싶어진다. 대체 얼마나 아름답길래 이런 그림이 나올 수 있나. 이런 생각으로 예전부터 가보고 싶던 장소가 있었으니, ‘쌍계사 가는 길’이었다.

박고석(1917~2002)이라는 화가가 있었다. 이중섭의 절친으로, 그와 마찬가지로 6·25 전쟁 중 월남한 후 2002년까지 살았다. 그가 그린 말년의 명작 중 벚꽃 만발한 ‘쌍계사 가는 길’이 여러 점 있는데, 그 작품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정말 그런 장소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노년에 등산 어렵자 벚꽃에 빠져
반드시 현장 찾아 내켜야 붓 들어

이건희도 구매, 80년대 수요 늘자
“내가 돈을 그리는 것 같다” 절필

공기·바람·심리 담아낸 벚꽃 그림
초창기 풍성하다 차츰 애잔해져

박고석의 1982년 작. ‘쌍계사 가는 길’. 원시적 에너지가 넘친다. 개인소장. [사진 유족]

박고석의 1982년 작. ‘쌍계사 가는 길’. 원시적 에너지가 넘친다. 개인소장. [사진 유족]

올해 벚꽃 철에는 가보리라 작정하고, 실행에 옮기려 인터넷을 뒤져봤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쌍계사로 올라가는 길은, 이미 ‘하동 십리벚꽃길’라는 브랜드가 매겨져 매우 유명한 길이 되어있었다. ‘혼례길’이라고 해서, 벚꽃 필 때 이 길을 지나면 연인은 결혼으로 이어진다는 ‘전설’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벚꽃 개화에 맞춰 축제가 벌어지고, 벚꽃이 언제 피는지 실시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동군에서는 CCTV를 매달아 홈페이지와 연결해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이 길을 1980년대 박고석이 다녔던 모습으로 상상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도 어쩌랴, 사람들은, 기술은, 편리성은 변해도 매년 봄이 되면 벚꽃이 핀다는 사실 하나만은 변함없는 진실로 남아있지 않은가. 그 사실에 감사하며, 나도 쌍계사 행렬에 끼었다.

박고석이 그렸던 비포장로 사라져

제목이 같은 1987년 작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좀 더 부드럽다. 개인소장. [사진 유족]

제목이 같은 1987년 작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좀 더 부드럽다. 개인소장. [사진 유족]

이미 구례쯤만 가도, 온 천지가 벚꽃이다. 오직 며칠 피고 마는 잠깐의 영화(榮華)를 위해 일 년을 벼르고 버틴 벚나무들이 때를 만났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의 화개장터에서 요기하고, 십리벚꽃길에 접어드니 역시 명불허전. 화개천을 따라 형성된 구불구불한 길을 그대로 살려 벚나무를 심다 보니, 자연스러운 곡선 길이 만드는 시야의 반전 매력이 압권이었다.

원래 이 벚나무는 진해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지역민을 동원해 의도적으로 심은 것. 언제까지나 조선을 통치할 줄 알고, 그 나라꽃을 이렇게 방방곡곡 심어놓았는지. 연원을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만, 꽃이 무슨 죄랴. 어쨌든 백 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쌍계사 벚꽃길은 이제 아름드리 벚나무로 터널을 이루었다.

다만, 박고석이 다녀가던 시절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았던 때의 운치는 사라진 지 오래된 듯. 도로는 사람이 아니라 차를 위한 것이었고, 길가에는 커다란 카페와 가게들이 즐비했다. 예전에 박고석은 이 길 한가운데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젠 더 이상 불가능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쌍계사 가는 길을 그린 1988년 수채화. [사진 유족]

쌍계사 가는 길을 그린 1988년 수채화. [사진 유족]

원래 박고석은 산 사나이였다. 1970년대 서울에서는 북한산, 도봉산을 많이 탔고, 강원도 설악산을 최고로 쳤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타다가 폭설에 조난해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도봉산에서 암벽등반을 하다가 떨어져 척추를 심하게 다쳤다. 모험심과 패기가 넘쳤던 박고석은 이 시기 도끼로 찍어 누른 듯 강력한 붓질의 암산(巖山)을 주로 그렸다.

그런 그가 나이가 들자, 건강상 이유로 더는 험한 산을 오르지 못하게 됐다. 그래서 찾게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쌍계사 길이었다. 1980년대 노년의 박고석은 거의 매년 벚꽃 철에 쌍계사에 갔다. 주로 머물던 곳은 쌍계사 일주문 바로 아래 있던 쌍계별장. 원래 도원암이라는 쌍계사의 암자였는데, 이 시기에는 여관으로 운영되었다. 주인 할머니가 차려주는 음식이 정갈하고, 인심이 좋아 돈 없는 사람은 거저 재워주기도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실제로 가보니, 쌍계여관은 다시 도원암으로 복원되어 사찰 소유물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단정하고 소박한 멋은 사라지지 않은 암자였다.

박고석은 벚꽃길에서 처음에는 길 한가운데에 서서, 나중에는 휴대용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스케치북에 드로잉을 했다고 한다. 그는 늘 현장에서 드로잉을 하거나 휴대용 수채물감 세트를 펼쳐 즉석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그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보았던 사진가 강운구는 박고석의 현장 스케치는 마치 ‘마술’ 같았다고 적었다. 그 스케치를 들고 화실로 돌아와 유화로 옮기는 것이 박고석의 작업 방식이었다.

절경 만나도 감응 없으면 안 그려

1987년 작 ‘화개마을’. 화폭을 채운 벚꽃이 몽환적이다. 개인소장. [사진 유족]

1987년 작 ‘화개마을’. 화폭을 채운 벚꽃이 몽환적이다. 개인소장. [사진 유족]

사실 모든 화가가 꼭 대상을 보고 나서 바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한번 봤던 기억을 토대로, 그 장면을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해방 후 금강산 그림이 그렇게 많이 그려진 것을 보라. 해방 전 가봤던 금강산을 기억에서 소환해서 그린 그림들이다. 그런데, 박고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반드시 어떤 장소에 가서 감응이 일어날 때만 스케치를 했고, 그것을 유화로 옮겼다. 절경을 찾아 높은 산에 힘들게 올라갔어도 감응이 없으면, 그는 스케치북을 꺼내지도 않고 내려왔다. 그러고는 아틀리에로 돌아와도 아무것도 안 그렸다. 그런 식이었으니, 박고석은 벚꽃을 그리려 해도 꼭 그 해, 그때 핀 벚꽃을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체험해야만 했다.

작업 방식이 이러하다 보니, 박고석의 벚꽃 그림은 같은 장소를 그려도 매년 그 결과가 달랐다. 그 해 그날의 날씨, 공기, 습도, 바람, 벚꽃의 개화 정도, 그리고 풍경을 바라보는 화가의 신체적 상태와 심리적 환경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절필 직전 거의 마지막 작품인 1992년 ‘설악청경’. 설악산 울산바위와 벚꽃을 한 화폭에 담은 상상의 풍경이다. [사진 유족]

절필 직전 거의 마지막 작품인 1992년 ‘설악청경’. 설악산 울산바위와 벚꽃을 한 화폭에 담은 상상의 풍경이다. [사진 유족]

1982년에 그린 ‘쌍계사 가는 길’은 나무에 분홍 잎이 덕지덕지 두껍게 매달려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물감을 덩어리째 얹은 듯 원시적인 에너지가 넘친다. 꽃잎도 떨어진 것 하나 없이 모조리 나무에 매달려 무거워 보일 정도로 풍성하다. 이에 비해 1987년의 벚꽃은 따듯한 햇살을 담뿍 받아 부드럽고 눈부신 아름다움이 강조되었다. 물감층은 얇고 촉촉하다. 벚꽃 터널 저 너머에는 더욱 환한 빛이 내리쬐는지, 멀리 보이는 흙바닥이 샛노랗게 보일 지경이다. 그러다가 또 화개마을을 내려다보며 그린 ‘화개마을’의 벚꽃은 어떤가.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벚꽃이 시야 전체를 뒤덮은 이 작품은 실로 몽환적이다. 이때 벚꽃은 이미 비 내리듯 흩뿌려지고 있었는지, 캔버스 위의 분홍 물감이 무너지듯 흘러내린다.

사실 벚꽃 모습만 매년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화가 자신도 매해 늙어가지 않나. 비슷한 풍경도 이를 바라보는 사람의 나이와 경험이 달라지면 또 다르게 보이는 법. 1980년 박고석에게 벚꽃이 생생하고 풍성해 보였다면, 10년 후 그가 바라본 벚꽃은 훨씬 더 뭉클하고 애잔하다. 화가는 그만큼 늙었고, 강렬한 에너지도 욕망도 시들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기록하듯, 한해 한해 벚꽃을 그려나갔다.

말년엔 산·벚꽃 공존 상상의 풍경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쌍계사로 올라가는 하동 십리벚꽃길의 한 구간. 벚나무 터널이다. [사진 하동군]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쌍계사로 올라가는 하동 십리벚꽃길의 한 구간. 벚나무 터널이다. [사진 하동군]

박고석은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더구나 그림이 수단이 되어 돈을 벌기 위한 의무감 때문이라면, 그건 더 싫었다. 박고석은 이전까지 그림으로 돈을 벌지 못하다가, 갑자기 1980년대부터 작품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수요자가 급속하게 생겼다. 고(故) 이건희 회장도 박고석의 작품을 많이 샀다. 그림을 구해달라는 사람이 많아져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이 그림을 더 그려달라고 졸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그림을 받아내려고 아틀리에에 찾아가면, 벽에 그림은 없고 등산 장비만 잔뜩 걸려있어 허탕 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리고 말년에는 “내가 돈을 그리는 것 같다”며 절필해 버렸다.

1980년대 쌍계사 가는 길 위의 박고석. 길이 비포장이다. 그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사진가 강운구가 찍었다. [사진 강운구]

1980년대 쌍계사 가는 길 위의 박고석. 길이 비포장이다. 그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목격했던 사진가 강운구가 찍었다. [사진 강운구]

절필하기 전 박고석의 거의 마지막 작품은 다시 벚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린 벚꽃은 더는 현장에서 만난 살아있는 벚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작품을 예외적으로 매우 크게 그렸는데, 여기에는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설악산의 울산바위와 쌍계사의 벚꽃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더 이상 그의 눈앞에 실재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간직된 벚꽃. 그것을 그는 점점이 아련하게 화폭에 담았다. 거동이 불편했고, 그렇게 기억을 더듬어 그릴 수밖에 없는 몸 상태에 이르렀으니, 그는 절필을 선택한 것이리라.

우리가 올해 봄을 맞아 꽃을 찾아다닐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아직 꽃놀이를 못 한 이가 있다면, 이 봄날의 축복을 만끽하러 떠남이 어떠할지. 지금쯤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은 다 지고 말았겠지만, 철쭉, 모란, 라일락, 장미. 아직도 필 봄꽃들이 창창히 남아있다.

김인혜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