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은희의 미래를 묻다

가혹한 환경은 유전자에 흉터를 남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전통적 유전학에서는 유전자의 존재 유무를 중시했다. 장미는 흰색에서 분홍·노랑·주황·빨강까지 온갖 색을 뽐내지만, 자연에서 파란 장미는 없다. 그 이유는 장미종을 통틀어 그 어떤 장미도 파란 색소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를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있으면 그 유전자의 정보를 담은 단백질이 만들어 발현시키지만, 그 유전자가 없거나 고장 나면 이를 만들지 못한다. 유전자 치료의 개념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특정한 유전자 정보가 누락되어 나타나는 문제를 외부에서 이를 보충해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학계 주목 받는 후성유전학 연구
유전자가 모든 것 결정하지 않아
같은 유전자라도 다르게 발현돼
환경에 따라 유전자가 변하기도

후성유전학

후성유전학

하지만 모든 유전자를 단지 존재 유무의 문제로만 접근해서 이해하려면 곧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피아노의 건반이 몇 개 빠지면 제대로 된 연주를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있는 건반을 다 누른다고 음악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약 200여 종이나 되지만, 모든 세포들은 단 한 개의 수정란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유전정보를 품고 있다. 즉, 인간 세포라면 모두 세포핵 내부에 약 2만 종의 유전자가 든 동일한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정보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표현형을 가지기 위해서는 선별적 발현이 필요하다. 즉, 어떤 세포가 근육세포가 되기 위해서는 전체 유전자 세트 중에서 근육세포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유전자만을 골라서 발현시키고 나머지는 억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나 다세포 생명체에서는 유전자의 선택적 발현과 억제는 전체 시스템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폐를 구성하는 폐포가 손톱처럼 케라틴을 합성한다든지, 각막 세포가 뼈세포처럼 골기질을 분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라.

유전자 ON·OFF 스위치

따라서 우리의 몸이 제 기능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유전자들을 적절히 선별해 발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 유전자의 선별적 발현을 조절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DNA의 메틸화(methylation)와 DNA와 결합된 히스톤 단백질의 아세틸화(acetylation)이다. DNA의 메틸화란 DNA를 구성하는 네 종류의 염기 중 시토신과 구아닌이 연달아 나타나는 부위에 메틸기(CH3)를 붙이는 것이고, 히스톤 아세틸화란 히스톤 단백질을 구성하는 라이신에 아세틸기(CH3CO)를 붙이는 것이다. DNA에 달라붙은 메틸기는 OFF 스위치처럼 작동해 유전자의 발현을 막고, 히스톤에 붙은 단백질은 ON 스위치가 되어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한다. 각각의 세포들은 특성에 맞게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적절히 사용해 자신에게 꼭 맞는 형태로 살아간다. 이 밖에도 마이크로 RNA의 생성, 히스톤 단백질 메틸화 등 다양한 유전자 조절 스위치가 존재해 각각의 세포들은 각자 입장에 맞는 ‘적절한’ 세포로 다듬어진다. 유전자를 활성 또는 비활성하는 스위치의 존재에 대해 사람들이 더욱 주목하게 된 계기는 이 스위치들이 얼마든지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였다. 이 유전자 스위치의 변화를 촉발하는 건 환경적 요인이다. 그중 하나가 노화다. 나이가 들수록 평균적으로 DNA 메틸화가 줄어든다. DNA 메틸기는 유전자를 끄는 스위치이므로, 이들이 사라지면 이전에는 기능하지 않았던 유전자들이 깨어나는데, 이들 중에는 암 유전자도 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통계적으로 암 발생률이 높아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 밖에도 흡연·음주·약물·굶주림과 폭식, 각종 스트레스 등 환경적 요인들은 유전자 조절 스위치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처럼 애초에 가진 유전자 자체의 이상이나 변화가 아니라, 유전자의 발현 패턴과 정도가 달라지며 나타나는 변화를 연구하는 학문인 후성유전학(epigenetic)에 대한 연구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후대로 이어지는 후성유전학적 변화

학자들이 후성유전학을 주목하는 건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당대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적 유전학에서는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밝은 피부의 사람이 햇빛을 많이 받으면 피부세포의 멜라닌 합성 기능이 강화되어 피부색이 어두워지겠지만, 그것이 장차 태어날 자손의 피부색에는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식세포가 만들어질 때, 대부분의 후성유전학적 표지들은 지워진다.

그러나 모든 후성유전학적 표지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임신한 암컷 쥐(1세대)를 굶기면 뱃속에서부터 영양실조 상태에 놓인 새끼쥐(2세대)는 DNA 메틸화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들은 이후에 먹을 것이 풍족한 상태에 놓였을 때 당뇨나 비만과 같은 대사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를 후성유전학적 각인이라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각인이 나타난 2세대 쥐들에게서 태어난 3세대 쥐들은 굶주림 상황에 놓인 경험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조군 쥐들보다 대사질환의 발생 위험이 크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후생유전학적 각인 중 일부는 대를 이어 전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비슷한 일은 인간에게도 나타난다. 전쟁으로 인해 극도의 영양실조에 장기간 노출되었던 사람들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은 최대 4세대까지 대사질환에 관련된 후생유전학적 각인이 지워지지 않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가혹한 환경이 주는 스트레스는 유전자에 상흔을 남기고, 그 흉터가 지워지는 데 몇 세대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돌발적으로 발생하여 대처하기 힘든 유전자 돌연변이에 비해, 후생유전학적 각인은 스트레스 요인이 되는 환경 개선을 통해 얼마든지 사전에 막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