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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선데이] 비밀번호 암기 고역에서 벗어나려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84호 29면

정재민 변호사

정재민 변호사

최근 로펌을 설립하면서 사업자등록을 하고 법인계좌를 신설하고 이런저런 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새삼 비밀번호가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느낀다. 계좌 비밀번호를 넣고 자동응답전화(ARS)를 받아 숫자를 넣고, OTP 카드번호와 공동인증서 비번까지 넣어야 겨우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인증서가 없으면 인증서를 깔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도 수많은 번호를 넣어야 한다. 하다가 막히기 일쑤다. 짜증이 나면서도 내가 기술 적응력 낮은, 시대에 뒤쳐진 사람인 것 같아 우울해지기도 한다.

온라인 통한 무차별 범죄 급증세
기술의 발전은 항상 부작용 동반
뛰는 범인 위에 나는 형사 있어야
신종 범죄 신속대응팀 설치 필요

ON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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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현금자동입출금기에 누르던 내 비밀번호가 ‘1111’이었다. 그때는 기술이 참 편리하다 생각했다. 어느 날 은행에서 비밀번호를 똑같은 숫자 네 자리로 만들지 말라고 해서 ‘1234’로 바꾸었다. 그러다 또 연속하는 숫자는 안된다고 해서 ‘1235’로 바꾸었다. 또 어느 날 비번을 6자리 이상으로 만들라고 해서 ‘123567’을 쓰며 버텼다. 그랬더니 이젠 8자리 이상으로 하되 영어와 특수 기호를 반드시 섞으라고 한다. 이쯤 되면 비밀번호 외우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다. 필자만 그럴까.

비밀번호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물론 범죄 위협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사용하는 온라인 기술 수준이 고도화되면서 이를 막기 위한 보안 수준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 폭증하는 범죄가 사기와 마약 범죄다. 사기는 2015년부터는 절도를 밀어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범죄 자리를 차지했다. 한때 마약청정국이던 우리나라는 이제 피자 한판 값으로 인터넷에서 마약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숫자만 놓고 보면 범죄는 줄고 있다. 법무부 범죄백서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살인은 32.3퍼센트, 폭력은 29.6퍼센트, 절도는 42.7퍼센트 줄었고, 전체 범죄 건수도 20퍼센트 이상 줄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범죄에 대한 불안을 더 크게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의 무차별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 대상자나 일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범죄가 행해진다는 뜻이다. 묻지마 살인 같은 경우도 있지만 범죄의 무차별성을 가중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온라인 범죄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범죄자는 직접 범죄 장소에 가 물리적 행위를 해야 했다. 칼을 들고 살인을 하거나, 만나서 거짓말을 해서 사기를 치거나, 남의 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물건을 훔치는 식이다. 그 시절에는 이웃과도 서로 다 알고 지냈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둠으로써 범죄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범죄가 무차별적이지 않았다. 대기권이 우주에서 날아오는 운석들을 걸러주듯이 원만한 인간관계가 범죄 피해 가능성을 걸러준 것이다. 그 시절 사람들은 복잡한 비밀번호를 외우는 대신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기술의 발전은 항상 부작용을 동반한다. 양자역학이 나오자마자 인류는 핵무기를 만들었다. 미국에서 최신 기관총이 나오면 군과 경찰보다 마피아 조직이 먼저 손에 넣는다는 말도 있다. 최신 과학기술이 나오면 수사기관보다 범죄자가 먼저 범죄에 활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수사기관이 그런 범죄자를 잡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범죄자들은 활개를 친다. 신기술이 자주 나올수록 범죄조직이 활개를 치는 시점과 수사기관이 대응할 수 있게 되는 시점 사이의 시차는 커지고 그만큼 범죄가 판칠 공간이 넓어진다. 보이스피싱이 처음 나왔을 때도 수사기관이 잡기 시작할 때까지 범죄조직들이 큰 돈을 벌어들였다. 지금은 스미싱이나 SNS, 또는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한 사기 범죄 조직들이 판을 치고 있다.

고도의 기술을 활용한 신종 범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수사기관이 필요한 전문 기술을 신속하게 습득해서 하나의 범죄조직이라도 제압하는 모습을 서둘러 보여주어야 한다. 뛰는 범인 위에 나는 수사관이 있어야 범죄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덜 하고 시민들이 불안을 덜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신종 범죄에 유연하고 민첩하게 대처할  있도록 수사기관 안에 신속대응팀과 같은 별도 조직을 만들면 좋겠다. 현재의 관료 시스템에서는 인력 한 명 충원하는 것도,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너무 오래 걸려서 제때 대응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조직이 생겨서 적시에 신종범죄에 대응할 수 있기를, 그래서 비밀번호가 더 복잡해지는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정재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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