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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 촉발 우려, 왕비 사진을 궁녀로 둔갑 시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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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4호 22면

[근현대사 특강] 왕비 시해 사건의 진실 ②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은 살해 현장에서 확인용으로 사용한 사진에 ‘궁녀’란 이름을 붙여 유포하였다. ‘궁녀’ 프레임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비 사진 진위 논쟁을 불러일으켜 백가쟁명 속 왕비 사진 부재론까지 등장시켰다. 왜 그랬는지 따져보자.

1892년 11월 프랑스계 미국인 기자 드 거빌 (A.B. de Guerville)이 조선에 입국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릴 만국 박람회 홍보대사 자격이었다. 기자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건청궁(경복궁 내)에서 왕과 세자를 알현하고 왕비가 참석한 가운데 홍보 영상물을 돌렸다. 귀국 후 프랑스의 유명 사진 잡지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에 알현과 방영의 이모저모를 담은 ‘조선의 이 왕가(Yi, Roi de Coree)’란 글을 실었다.

“왕은 하얀 얼굴에 친절하고 부지런”

사진 1. 드 거빌의 ‘조선의 이 왕가’ 기사와 함께 실린 고종과 세자의 사진.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

사진 1. 드 거빌의 ‘조선의 이 왕가’ 기사와 함께 실린 고종과 세자의 사진.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

드 거빌은 ‘매직 랜턴(환등기)’으로 200매나 되는 장면을 스크린에 비췄다. 워싱턴의 백악관, 시카고의 20층 빌딩, 나이아가라 폭포, 철도 시설, 그리고 박람회장의 큰 건물들이 차례로 나왔다. 왕비는 관례대로 주렴 뒤에 앉았다. 첫 사진이 비치자 그쪽에서 술렁대는 기척이 있더니 두 번째 영상이 비치자 왕비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와 스크린에 다가가 두 손으로 화면을 어루만졌다. 왕비는 통역을 불러 카메라와 사진에 대해 ‘수천 가지’ 질문을 쏟았다. 근대 문명의 ‘마술 등불’이 조선의 왕비를 사로잡았다. 건청궁에는 미국 에디슨 조명회사와 계약하여 1887년 전등이 켜졌으나 환등기에 비치는 미국 풍경은 처음이었다.

드 거빌은 왕실 사람들에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왕은 하얀 얼굴에 총명과 친절이 풍기고, 모든 정사를 직접 처리해 훌륭하고 부지런한 임금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왕의 야행성 업무 스타일이 나온다. 왕은 암살을 두려워해 대신들과 가장 열심히 일하는 시간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낮에는 휴식을 취한다고 했다. 최근 역사적 인물들을 성적인 뒷담화의 소재로 삼았다가 구설에 오른 어느 총선 출마자는 고종에 대해서도 ‘밤 파티’를 주장한 적이 있는데, 가당치 않은 주장임을 이 미국인 기자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다.

사진 2. 드 거빌의 ‘조선의 이 왕가’ 기사와 함께 실린 왕비의 사진.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

사진 2. 드 거빌의 ‘조선의 이 왕가’ 기사와 함께 실린 왕비의 사진.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

드 거빌은 또한 왕비는 키가 작고 예쁘게 생겼다고 했다. 그녀는 아주 총명해 보여 왕의 국정을 돕고 있다는 소문을 기억나게 한다고도 적었다. 드 거빌의 글에 왕과 세자가 함께 한 사진(사진1)과 왕비 사진(사진2)가 실렸다. 각각 ‘이씨, 왕과 세자(Yi, Roi de Coree et Son Fils)’ ‘민씨, 왕비(Min, Reine de Coree)’라는 캡션이 붙었다. 왕은 그 이전에도 사진기 앞에 선 적이 있지만, 왕비는 처음이었다. 조선왕조는 역대 왕의 모습을 어진(御眞)에 담았으나 왕비에게는 이 전통이 적용되지 않았다. 최초의 왕비 모습 공개였다. 문명의 충격이 가져온 변혁이었다.

1894년 7월 31일 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는 ‘고쿠민(國民)신문’에 ‘궁녀’란 캡션이 붙은 삽화가 실렸다.(그림1) 신문 창간자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는 원래 자유 민권운동가였다. 1890년 메이지 일왕의 ‘교육칙어’ 반포로 천황제 국가주의가 대세를 이루자 이에 맞춰 신문을 창간하고 국수주의 확산에 일익을 담당했다. 외무성 재정 지원을 받아 서울에 지사 격으로 ‘한성신보’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 신문사 기자들이 왕비 시해에 가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일전쟁이 터진 후 6일째 되는 날에 실린 삽화 ‘궁녀’와 관련되는 기사는 지면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편집 사고일까? 보고 그린 원화 사진을 추적해볼 일이다.

사진 3. ‘제조상궁’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사진 3. ‘제조상궁’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뉴욕 발행 『디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 1894년 11월 호 표지에 ‘왕비의 상궁(The Queen’s Chief Lady in Waiting)’ 사진이 실렸다.(사진5) 고쿠민 신문의 ‘궁녀’ 삽화보다 3개월 뒤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프랭크 G 카펜터가 이해 여름 일본을 거쳐 전쟁터가 된 서울에 와서 왕과 세자를 인터뷰한 기사에 연계된 사진이다. 사진의 주인공 모습은 삽화 ‘궁녀’와 차림이 비슷해 원화일 소지가 있다. 신분을 궁녀 중 최상위 ‘상궁’으로 바꾼 것이 뭔가 수상하다. 일반적인 궁녀의 실제 모습은(사진3)과 같다. 앞의 ‘궁녀’ 나 ‘상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시중드는 궁녀가 의자에 앉은 것이 가당치 않다.

(사진5)에서 주목할 것은 머리 장식 떠구지가 (사진3)의 궁녀의 것보다 훨씬 크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점이다. 떠구지 아래 가로질러 보이는 쌍비녀도 주목할 것이다. 쌍비녀는 조선 천지에 왕비 외에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장식이다. 1894년 12월 22일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왕을 알현한 장면 그림에도 동석한 왕비는 떠구지를 쓰고 비녀 둘을 꽂았다. (2024.2.3. ‘근현대사 특강’) ‘상궁’이 아니라 왕비 사진이 확실하다.

사진 4. ‘예복 차림의 궁중 귀부인’이란 캡션이 붙 은 사진, 카를로 로세티, 『한국과 한국인』, 1904.

사진 4. ‘예복 차림의 궁중 귀부인’이란 캡션이 붙 은 사진, 카를로 로세티, 『한국과 한국인』, 1904.

같은 왕비 사진으로 (사진2)와 (사진5)의 관계는 어떤가? (사진2)는 편복 차림, (사진5)는 예복 차림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얼굴 모습이 어딘가 달라 보이는 것은 화장 때문이란 해석이 나와 있다. 2007년 7월 24일 연합뉴스는 미국 LA에서 영국인 수집가 테리 베넷(Terry Bennet) 씨 소장 조선 왕실 인물 사진 4점이 공개됐다고 보도했다. 드 거빌 기자 글에 실린 (사진1)과 (사진2)에 대원군 사진 2점이 보태진 4점이다. (사진2)에는 독일어로 ‘살해된 왕비(Die Ermordet Königen)’란 설명이 필기체로 쓰여 있다.

그림 1. ‘고쿠민신문’ 1894년 7월 31일 자.

그림 1. ‘고쿠민신문’ 1894년 7월 31일 자.

복식 전문가 C 씨는 (사진2)의 얼굴 화장과 머리 장식의 떨잠을 주목했다. 얼굴 모습에서 먼 산을 그리듯 치켜 그린 눈썹 화장 기법은 원산대(遠山黛)로서 귀한 신분의 여성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머리 떨잠은 상궁 정도 신분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블로그) (사진2)와 (사진5)의 하반신 자세가 비슷한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왕비 사진 논쟁에서 어떤 이는 왕비가 어찌 다리를 벌릴 수 있느냐고 우겼다. 반대로 봐야 할 문제이다. (사진1)의 왕이나 대원군의 여러 사진에서 보듯이 왕실 사람은 한결같이 다리를 모으지 않는 자세다.

반인륜 2차 가해, 소모적 논쟁 비감

사진 5. ‘왕비의 상궁’이라는 캡션이 붙은 사진. 『디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 1894년 11월 호.

사진 5. ‘왕비의 상궁’이라는 캡션이 붙은 사진. 『디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 1894년 11월 호.

(사진4)는 10년 뒤 1904년 이탈리아 외교관 카르로 로제티의 『한국과 한국인』에 실린 것으로 ‘예복 차림의 궁중 귀부인 (Una Dama Di Palazzo In Abito Di Corte)’이란 설명이 붙었다. 시계열 상 촬영자는 청일전쟁 개전 전후에 왕실을 방문한 프랭크 G 카펜터뿐이다. 1894년 무렵에 촬영된 사진일 것이란 얘기다. 문제의 (사진5)는 이 사진의 배경을 지워 변조한 것이다. 이 사진의 배경은 ‘궁녀’ 또는 ‘상궁’이 있을 공간이 결코 아니다. ‘궁녀’ 사진으로 만들려면 품격이 넘치는 그 배경을 지워야 했다.

프랭크 카펜터의 기사는 일본 측의 영향이 물씬 풍긴다. 전쟁 홍보 잡지의 대표 격인 『풍속화보』(東陽堂) 10월 28일자 제1회 ‘일청전쟁도회(圖繪) 임시증간호’에 실린 여러 편의 글들은 청국의 그늘에서 학정을 일삼는 왕비 민씨 세력의 제거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왕비 민씨가 김옥균 살해의 주체이고 동학 농민군 봉기 원인이라고 했다. 카펜터의 논조는 이를 베끼다시피 한 느낌이다. 뭔가 잘못 듣고 민씨 세도가 조선왕조 개창 때부터 시작했다고 적기도 했다. 도쿄에서 외국 기자 단속 교육을 받고 왔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내용이다. 2년 전의 드 거빌의 글과는 판이하다.

1894년 7월 23일 0시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은 동아시아 혼란의 원흉으로 오해한 왕비를 살해하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을까? 살해 음모에 깊이 관여한 ‘고쿠민신문’은 작전의 실패로 관련 기사가 불발한 상태에서 준비해 둔 ‘궁녀’ 삽화만 불식 간에 내보내는 ‘편집 사고’를 낸 것이 아닐까?

왕비 사진은 1895년 10월 8일 아침 8명의 장교가 인솔하는 46명 장사가 건청궁에서 왕비를 시해할 때 실제로 확인용으로 사용되었다. ‘고쿠민신문’이 오보로 낸 ‘궁녀’ 프레임은 러일전쟁 후 진실로 굳혀졌다. 저들은 시해 후 왕비 사진이 항일 투쟁의 핵심 기재가 될 것을 우려하였다. 명백한 반인륜의 2차 가해 행위다. 왕비 사진 진위 논쟁은 그 프레임에 갇힌 소모적 행위로 느껴져 비감하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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