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들기] 43. 과천 서울대공원 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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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대공원 기공식이 열린 직후인 1978년 12월 구자춘 서울시장이 내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이듬해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서울대공원 부지와 관련한 김재춘씨와의 약속들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대공원 조성 공사가 상당히 진척됐는데도 金씨가 제일은행에 진 빚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에 金씨가 전두환 국보위 의장에게 진정서를 내게 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80년 12월 서울시는 金씨를 대신한 제일은행으로부터 부채 탕감을 조건으로 1백36만평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73년 金씨가 과천 일대를 서울 시민을 위한 대공원으로 개발하라는 朴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이듬해 작성한 '서울대공원 종합계획서'에는 3백만평 부지에 자연동물원.어린이왕국.스키장.골프장 등을 갖추도록 돼 있었다. 케이블카.호텔.방갈로.유스호스텔 등 많은 부대시설 건립 계획도 들어있었다.

서울대공원 조성 방침을 확정한 76년 말 具시장은 홍익대 박병주.나상기 교수팀에 공원 설계를 의뢰했다. 이 설계에 따르면 막계 2리에 7만5천평의 동.식물원을, 막계 1리의 30만평에는 디즈니랜드를 본뜬 첨단 놀이시설과 야외음악당 등을 각각 배치토록 했다.

이처럼 초기의 서울대공원 설계는 레저시설 위주였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조성되는 대부분의 동물원이 대규모이고 울타리가 없는 개방형이라는 점과 당시 평양에 80만평 규모의 동물원이 들어선 것이 자극제가 됐다. 이에 따라 서울대공원 설계는 87만평의 동물원 위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具시장은 당시 재계의 혜성으로 떠올랐던 율산그룹 신선호 회장에게 공원 설계를 맡겼다.

申회장은 미국 용역회사 PRC(Planning Research co.)에서 미국인 기술자 11명을 영입해 서울대공원 설계를 전담할 한국PRC를 만들었다. PRC팀은 홍익대팀 설계 내용 가운데 동물원과 레저시설의 위치를 바꾸고, 음악당.호텔.모노레일.케이블카 등을 없애버렸다. PRC팀 설계를 토대로 서울대공원 조성 공사가 시작됐다.

공원 부지 내 기존 시설들을 철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적지않은 갈등이 빚어졌다. 옛날부터 농사를 지어온 원주민과 신흥종교단체인 장막성전의 신도들이 공원 부지에 살고 있었다. 집이나 논밭을 갖고 있던 주민에겐 청계산 아래쪽 땅을 줬다.

그런데 세입자에게는 아무런 대책을 세워주지 않았다. 이들 중 일부는 옮겨갈 집을 마련해달라며 밤중에 칼을 들고 서울대공원 건설사업소 숙직실에 침입하기도 했다. 이들과 서울시 간 분쟁은 84년 대공원 개원 때까지 6년 동안이나 계속됐다. 결국 시는 이들 중 일부를 안양 시내 주공아파트단지에 입주시켰다, 무허가 건물들은 강제 철거했다.

한편 많은 사람은 대공원 입구에 있는 연못도 대공원 조성 때 만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원래 저수지였던 이 연못의 소유권은 지금도 서울시가 아닌 흥안농지개량조합이 갖고 있다. 7만2천평 규모의 연못에는 1백19만t의 물을 담을 수 있다.

서울시는 연못의 소유권을 넘겨달라고 농지개량조합에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호안 조성 및 조경 공사를 벌였다. 그 부작용으로 연못은 관상용으로 꾸며졌을 뿐 대공원과 긴밀히 연계된 수변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됐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알림=11월 4일자와 5일자 27면에 게재된 남기고 싶은 이야기 '서울 만들기' 서울대공원 부지 기사와 관련, 김재춘씨는 "서울대공원 부지에 대한 부채는 개인이 아닌 본인이 대주주로 있던 인산농원 부채였으며 1980년 전두환 당시 국보위의장에게 제출한 진정서는 부채 탕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서울대공원 운영권과 대토 약속을 이행해 줄 것을 촉구한 것으로 이와 관련, 아직도 서울시 등과 소송이 진행 중"이라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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