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사회적 화해로 한·일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양 문명의 바람이 동아시아에 불어와 큰 파도를 일으킨 지 어언 한 세기 반이 지나고 있다. 천지가 개벽하고 삶의 양식이 바뀌었다. 새로운 문명의 바다에서 부침하던 동아시아 3국은 시차가 있기는 했지만, 문명의 파도를 타고 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 각각은 당당한 모습으로 문명국에 도달했다.

밀려오는 거센 바람을 맞받으며 선진의 깃발을 휘날린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신문명을 접한 뒤, 구체제를 일신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갔다. 그 과정에 우뚝 선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였다. 계몽사상가였던 그는 1885년 3월 16일자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게재한 ‘탈아론(脫亞論)’이라는 칼럼에서 신문명을 향해 앞서가는 일본의 결단을 주문했다.

민간 주축 한·일 교류시대 열려
양국 정상 화해 노력 계속해야
과거 청산·민간교류 병행 필요
한·일 화해위, 조직적 관리를

또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웃 나라 조선을 안타깝다는 듯 일본이 조선과 함께 나아가기 위해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는 짐이 된다고 생각한 ‘오랜 친구’를 버렸다. 버리면서 그는 ‘친구’의 모습을 폄하하고 왜곡했다. 얼마 후 그의 주장을 따르는 후예들은 조선의 역사와 정체성마저 부정했다.

일본은 1951년 연합국과 평화조약, 즉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은 이후 선진의 지위를 회복한 뒤 지난날의 부채를 줄여 보고자 한국과 정치적 화해를 모색했다. 그것은 종교적 구원, 도덕적 응보, 법적 정의 실현을 통해 화해를 추구하는 종교적·윤리적 화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적 화해의 시대 저물고 있어

미국 프로야구(MLB) LA 다저스 소속의 오타니 쇼헤이(가운데)가 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 출전을 위해 지난달 15일 입국하고 있다. [뉴스1]

미국 프로야구(MLB) LA 다저스 소속의 오타니 쇼헤이(가운데)가 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 출전을 위해 지난달 15일 입국하고 있다. [뉴스1]

정치적 화해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자는 정부다. 정부는 자국의 피해자·가해자, 시민단체, 일반 국민의 의사를 결집해 상대국 정부와 외교적 협의를 통해 화해를 모색한다. 한·일 양국은 1965년 국교정상화와 1998년 파트너십 선언을 거치면서 화해의 수준을 높여왔다. 근년에 이르러 격랑을 일으켰던 강제 징용자 문제도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잔물결을 남기긴 했지만 큰 파고는 지나갔다. ‘책임론적 화해론’에 기반했던 정치적 화해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지녔던 이상과 위력은 그 소명을 다한 듯하다. 식민 지배의 굴레를 벗어난 세대와 미래에 태어날 세대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 눈앞에 있다.

나는 지난 1월 새로운 세상에 대비하기 위해 역사 문제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입장과 견해를 조정·중재하며 타협을 만들어갈 주체로 화해위원회를 제시한 바 있다. 화해위원회의 임무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적 화해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화해의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다. 일본 천황의 방한과 한·일 신조약을 기획하고, 역사 문제의 잔물결을 관리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기억의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전자에 해당하는 임무다. 후자는 사회적 화해 차원에서 당당한 문명국인 한국 시민과 일본 시민이 교류·협력을 이뤄가는 기회의 장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런 교류와 협력은 정치적 화해의 시대에도 있었다. 그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 부침을 거듭하는 역사 화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무슨 차이가 있기에 정치적 화해의 시대에서 사회적 화해의 시대로 이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지난해 이루어진 셔틀 외교의 복원은 윤석열 정부가 단행한 정치적 화해 조치 중 하나였다. 올해도 양국 정상의 화해 의지를 견고하게 하고 그 결실을 맺기 위한 노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지난달 14일 일본의 한 민영방송은 “기시다 총리가 3월 20일 서울 고척돔에서 열리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개막전을 참관하고 (한·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다분히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 의도가 있는 방한 기획이라고 보았다. 기시다 총리가 4월 총선에 임하는 윤 대통령을 지원하는 동시에 일본 내에서 자신의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했을 가능성이 있어서다. 이 이벤트가 성사됐다면 정치적 화해를 주도하는 ‘두 주역’에 포커스가 맞춰졌을 것이다. 기시다 총리의 방한이 불발됐지만 정치가 빠진 그곳에서 LA다저스 소속의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새로운 화해의 바람을 일으켰다.

오타니가 몰고 온 화해의 바람

오타니는 지난해 LA 다저스와 9000억원이 넘는 계약을 맺었다. 이는 세계 프로 스포츠 사상 최고 금액으로, 광고 등 부가적인 수입이 1000억원을 넘길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면서 오타니는 ‘1조원의 사나이’로 불린다. 그의 서울 방문에 동행하며 세간에 알려진 배우자가 보여준 겸손한 모습도 한국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인이 열광한 건 그가 평소에 보여준 한국에 대한 애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인스타그램 계정에 “한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한국 팬들은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고척돔에서 ‘일본인 오타니’에 화답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서로 상대를 좋아한다고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교류하고, 그 얘기가 매체를 타고 사회에 퍼지는 시대가 되었다. ‘오타니 현상’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은 양국 정상의 정치적 이벤트보다 훨씬 깊고 컸다. ‘시대의 이행’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여기에서 어두운 과거를 짊어지고 무거운 책임의 하중을 견디며 진행되어온 정치적 화해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실력과 겸손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고 일반인들이 상대를 좋아한다는 원초적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모습에서 밝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사회적 화해의 시대 개막을 느꼈다. 화해위원회의 임무는 앞으로 사회적 화해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는 것이다.

일본은 우리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서양 문명이 동아시아에 불어 왔을 때 신문명에 심취한 후쿠자와는 우리를 ‘나쁜 친구(惡友)’라고 사절했다. 그의 후예는 우리에게 악행을 가해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동아시아에 또 다른 문명의 바람이 일어나고, 디지털 혁명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일본을 포용한다. ‘좋은 친구(善友)’ 사이가 되어 한·일 공동체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

박홍규 고려대·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