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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처에서 첩으로 천당·지옥 오갔던 아내들의 수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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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황효원 가족의 가슴 아픈 처첩 논쟁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550년 전 조선 성종 7년, 황효원(黃孝源)은 이혼과 결혼을 멋대로 한 혐의로 사헌부의 리스트에 올랐다. 30세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며 청현직을 두루 거친 황효원은 42세 때 세조의 즉위를 도운 대가로 좌익공신에 봉해진다. 이후 그는 대사헌, 각 도의 관찰사, 한성부윤(서울시장) 등 요직에 몸을 담근 세조 시대 인사이더였다. 게다가 관향 상주의 이름을 따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지며 누구도 쉽게 넘볼 수 없는 확고한 권력과 명예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런 그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법의 심판대에 오른 것이다. 숨기고 싶었을 가족사가 만천하에 까발려지게 되었다.

아내 신분 따라 자녀들 신분 갈려
육순의 공신 황효원 간절한 호소

성종은 “정리 따져 처로 인정해야”
사헌부 “난신의 딸” 물고 늘어져

처 둘 금지 처첩분간법 역폐단
정치는 유능했지만 오만·탐욕

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 사당. 황효원은 상주 황씨 중시조다. 황효원의 시호였던 양평(襄平)을 새긴 편액 ‘양평묘’가 보인다. [사진 용인시민신문]

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 사당. 황효원은 상주 황씨 중시조다. 황효원의 시호였던 양평(襄平)을 새긴 편액 ‘양평묘’가 보인다. [사진 용인시민신문]

사헌부의 보고에 따르면 황효원은 처음 아내 신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버리고(棄之), 임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화목하지 못하다 하여 버리고 처음 아내 신씨와 재결합하였다. 부인 신씨가 죽은 뒤에는 과거에 공신(功臣)으로 하사받은 여비(女婢) 작은조이(小斤召史)를 첩으로 삼았다가 이후 처로 변경했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첩을 처로 바꾼’(以妾爲妻) 세 번째 아내인데, 국법대로 그녀를 다시 첩으로 돌려놓으라는 것이다. 사헌부가 주장하는 황효원의 죄는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사욕을 채웠고 대신으로서 체통을 잃어 윤리를 훼손한 것이다. 그런데 왕은 첫 보고를 받은 날 황효원의 세 번째 아내 이씨는 후처임을 분명히 했다. (『성종실록』 7년(1476) 5월 2일)

사헌부·사간원 한 달간 왕 흔들어

역시 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의 신도비. [사진 용인시민신문]

역시 경기도 여주에 있는 황효원의 신도비. [사진 용인시민신문]

그러자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 협공으로 5월 한 달 하루도 빠짐없이 “황효원 비(婢)의 후처 논정을 환수하라”며 왕을 흔들어댔다. 왕은 황효원의 아내 이씨는 법리(法理)보다는 정리(情理)로 접근해야 할 사람이라고 한다. 즉 이씨는 단종복위에 가담한 죄로 멸문의 화를 입은 이유기의 딸로 원래 명족(名族)이자 왕실의 척족이라는 점, 오래전에 면천되어 사족의 신분을 회복한 점 등을 들어 후처로 삼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난신(亂臣)의 딸을 여종으로 받아 첩으로 삼았다가 방면되자 처로 삼은 것”은 “난신의 외손을 조정에 서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대간(臺諫)의 경고에 열아홉살의 어린 왕은 굴복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후처 이씨는 첩으로 변경되었다.

15세기 조선사회를 달군 핫 이슈는 처첩분간(妻妾分揀), 즉 누가 정실이고 누가 측실인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조선 건국의 설계자들은 신유학적 가족 이념에 따라 처첩 및 적서의 제도화를 추진하는데, 그들 사이에 일종의 질서를 세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건국 20년 태종 13년에는 “예에는 처가 둘 일수 없다”(禮無二嫡)는 유교의 혼인관을 따라 일처(一妻) 외는 모두 첩으로 논정(論定)하는 ‘처첩분간법’이 발효되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누리던 동등한 권리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강등되거나 박탈되는 법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귀족이나 사족의 경우 특히 민감하여 내부에서 해결이 안 되어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주 황씨는 용인시 기흥구 일대에 집성촌을 이뤘다. 입향조는 중시조 황효원이다. 용인에 있는 묘역. [사진 용인시민신문]

상주 황씨는 용인시 기흥구 일대에 집성촌을 이뤘다. 입향조는 중시조 황효원이다. 용인에 있는 묘역. [사진 용인시민신문]

황효원은 한 때 형조와 사헌부의 수장이었던 만큼 국법의 처첩제 내용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처는 오직 1인’이라는 말은 병처(幷妻) 또는 유처취처(有妻娶妻, 처가 있는데 또 처를 맞이함)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첩은 처와 양립이 가능하다. 그래서 황효원은 선처(先妻) 신씨와 이혼을 한 후에 임씨를 후처로 맞았고, 임씨와 이혼한 후에 신씨와 재결합한 것이며, 신씨와 사별 후 이씨와 혼인 예를 치렀기에 세 아내 모두 처라고 주장한다. 사실 처나 첩이나 그 자신은 크게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존귀(尊貴)와 비천(卑賤)의 신분으로 갈리는 소생 자녀들이 문제인 것이다.

황효원은 세 번째 아내 이씨가 첩이 아닌 처임을 증명하기 위해 혼서(婚書)와 예장(禮狀) 등의 자료를 제출했지만 대간들의 교묘한 언술에 걸려 보다시피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바로 다음 날 대사간 최한정은 황효원의 두 번째 아내 임씨도 첩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쯤에서 한 집안을 가루로 만들 작정이라도 한 듯 덤비는 대간들이 의아하게 여겨진다. 당시 임씨 소생의 두 아들 황석경과 황준경은 생진시(生進試)와 한성시에 응시 원서를 제출했는데, 서자일 수 있다며 보류된 상태였다. 논정에 돌입하자 예조에서는 임씨의 혼서(婚書)와 공신록에 아들들이 적자로 기록된 사실을 알려왔다. 그럼에도 양사는 황효원의 혼인 생활을 염탐하고 한성부 장적까지 샅샅이 뒤져 한 가족을 능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황씨 가의 쟁송 법정다툼 번져

황효원의 초상.

황효원의 초상.

대사간 최한정에 의하면, 황효원은 신씨에게 아들이 없자 한 양녀(良女)를 첩으로 삼아 아들 둘을 낳았다. 그들을 적자로 만들기 위해 혼서(婚書)를 조작하고 신씨를 버린 것으로 꾸며 임씨를 후처로 만들었다. 한성부의 장적에는 신씨와 임씨를 고쳐 쓴 흔적이 있고 두 아들을 “버린 첩의 자식”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에 황효원은 사실관계를 바로 잡는 글로 대응한다. 처음 아내 신씨와 이혼할 때 그 오라비가 까닭 없이 처를 버린다며 고소한 사실과 어머니의 뜻으로 사족녀 임씨와 혼인하게 되었는데, 그 혼례에 참석한 명단까지 제출했다. 그리고 한성부 장적에 대해서는 아비 된 자가 어떻게 ‘버린 첩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지, 조작된 “원수의 짓”이 분명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황효원은 후처 임씨를 이름도 모르는 양녀로 둔갑시켜 아들을 얼자(천인 신분의 첩에서 난 자식)로 만들려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대사간 최한정에게 묻는다. 황씨 가의 처첩 쟁송은 황효원과 최한정의 법정 다툼으로 번지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한편 이쪽저쪽의 말을 다 듣고 난 왕은 “임씨를 황효원의 후처로 논정한다”고 판결한다. 그럼에도 대사간은 물고 늘어지며 황효원의 두 아내를 다시 조사할 것을 건의한다. 왕은 “나는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데, 경은 어찌 그리 고집스러운가”라고 하며 법과 인정은 서로 함께 가는 것이라고 한다. 갓 스무살을 넘긴 청년 왕이 두 번의 혼인에 많은 자식과 손자까지 둔 노년의 최한정에게 인생의 원리를 가르치는 형상이다. 황씨 가의 처첩 논정이 시작되기 2개월 전, 5품 교리이던 최한정은 몇 단계를 뛰어넘어 당상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덕망과 재능이 검증되지 않은 자라며 임명을 철회하라는 비판이 거세었다. 무능함을 상쇄할 기회로 무리수를 둔 것인가, 아니면 뒤틀린 심사 때문인가. 아니나다를까 대사간 최한정은 황효원 처첩논정을 기획하여 사건을 주도해 간 것 외에 별다른 업적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 임씨가 후처로 논정되고 아들들이 사족의 일원으로 제자리를 찾자 황효원은 세 번째 아내 이씨의 첩 논정을 상고해 줄 것을 건의한다. 즉 이씨는 아비의 죄로 노비가 되었는데, 그녀의 외가와 자신의 집안이 연족(連族)인 관계로 공신이 된 자신에게 배정되었다고 한다. 이씨는 줄곧 외가에서 살았는데, 늙은 홀아비가 된 아들의 배우자 구하기가 어렵게 되자 어머니와 이씨의 외조모가 함께 도모한 일로 이 혼례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신의 자녀는 출생 전 외조(外祖)가 범한 죄로 사족과 혼인을 맺지 못하니 신의 자녀가 인류에 복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왕은 노대신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며 이씨를 다시 후처로 논정했다. 조정은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대간들의 집요한 공격이 두달 간 지속되면서 이씨는 다시 첩이 되었다. 훗날 중종 2년에는 황효원의 외손자가 서출이라며 관직 제수가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사위 박영문은 처모 이씨의 사건을 담은 『적첩상고일기초(嫡妾相考日記草)』를 제출함으로써 이씨의 딸 황씨는 박영문의 정실로 논정된다.

100차례 조정회의 국정 마비 지경

황효원의 나이 63세, 성종 7년 5월 2일에 시작된 ‘황효원 처첩논정’은 성종 12년 9월 19일 68세의 황효원이 “피를 토하며 죽은” 후에야 끝이 났다. 그가 죽은 이후 재개된 적서 논쟁은 치지 않더라도 5년이 넘도록 100여 차의 조정회의를 잠식하며 국정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태산이 닳아 숫돌이 되고 황하가 좁아져 허리띠가 되도록(山礪河帶)” 대대손손 영광을 누리라는 왕의 교서를 받은 상산군 황효원(1414~1481), 그 노년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그는 행정가로서 유능했지만 사람을 오만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단점이 있었고, 재산 증식에 재능이 있어 화가옹(貨家翁)으로 불리었다. (『황효원졸기』) 그의 인생이 이후 역사에 던진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