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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궁지 몰린 기시다와 한·일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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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 CSIS 키신저 석좌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 CSIS 키신저 석좌

한·일 양국 정상의 정치적 의지와 기반은 양국 관계에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작동해 왔다.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 시절의 우호,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공동선언도 두 정상의 지지율이 임기 중 최고치를 기록할 때에 이뤄졌다.

하지만 때로는 지도자가 관계 개선을 선택하지 않는 동인으로 높은 지지율이 작동하기도 한다. 아베 신조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 시절이 그랬다. 그럼에도 한·일 관계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국내의 반대 여론을 극복하고 관계 안정화를 추구하려는 정상 차원의 의지와 정치적 자산이었다. 가장 최근의 사례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다.

지도자 의지가 양국 관계 결정
기시다 지지 추락, 차기 하마평
누가 되든 한·일 관계 기반 탄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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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최근 국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기시다 총리의 입지는 한·일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까.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은 최근 사상 최저 수준인 20%대로 떨어졌다. 일본 정치권의 관심은 이제 기시다 총리가 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니라, 오는 9월 열릴 전망인 자민당 전당대회에서 누가 기시다의 뒤를 이을 당 총재로 선출될 것인가에 있다.

한·일 관계 개선 동력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 정치 때문에 무너지던 패턴이 이번에도 반복될 것인가.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먼저 한국에서 한·일 관계 개선을 비롯한 윤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대한 지지가 탄탄하다.

한국인은 문재인 전 대통령 재임 시절 한국이 세계에서 너무 고립됐고 글로벌 입지를 다시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신임 일본 총리가 누가 되든 기시다의 한·일 관계 정책 기조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울 충분한 여력이 있다.

둘째, 일본의 글로벌 입지를 위해서 굳건한 한·일 관계가 필수적이라는 공감대가 일본 내부에 형성돼 있다. 셋째, 기시다 총리의 후임으로 유력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한·일 관계 개선에 브레이크를 걸 이유를 찾기 힘들다. 이 점이 과거와 다른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유력한 ‘포스트 기시다’ 후보를 가능성이 높은 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가미카와 요코 외무상=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 탄생을 기대하게 하는 그녀는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했다. 법무 장관 재직 당시 법과 질서를 철저하게 수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총리가 되면 윤 대통령과 ‘케미’가 좋을 것이다. 인지도는 낮지만 자민당 최대 계파의 강한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테기 도시미쓰 자민당 간사장=경제통상산업 장관을 역임한 그도 하버드 대학 학위를 보유하고 국제 감각을 지녔다. 기시다 총리의 한·일 정책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깐깐한 성격에 비해 자민당 내부 지지율은 낮은 편이다.

◆고이즈미 신지로 중의원=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이들이다. CSIS 연구원 경력이 있고 국제 감각을 충분히 갖췄다. 청년층에서 특히 인기가 높지만, 자민당 중진들은 총리직을 맡기에 아직 어리다고 여긴다.

◆고노 다로 디지털상=외무상과 방위상을 역임한 그는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체결한 위안부 해법을 문재인 대통령이 무력화하자 당시 외무상으로서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외무상을 지낸 부친(고노 요헤이)처럼 한·일 관계 강화에 나설 것으로 예상한다.

◆다카이치 사나에 전 총무상=매파이자 국수주의의 끝단에 선 인물이다. 총리로 선출되면 한국이 가장 우려할 인물이다. 당내 지지 기반이 취약해 당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이시바 시게루 전 방위상=대중 지지가 어느 정도 있지만, 자민당 내부에 적이 많다. 그의 정책은 이념보다는 상황에 따라 바뀌는 성향을 보여 관료들이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기시다 총리의 한국 관련 정책을 뒤집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기시다 총리가 지금의 정치적 위기에서 살아날 가능성을 여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차기 총리 후보군을 보면서 느낀 점은 누가 되든 한·일 관계 개선을 반대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어쨌든 지금의 한·일 관계는 양국의 국내적 불안 요소를 견뎌낼 만큼 충분한 기반을 확보한 것 같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